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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06일 12시 2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06일 12시 27분 KST

'일상적인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해

그것은 폭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권력 차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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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는 과거 형법상 ‘정조의 죄’로 분류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강간범을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하며 엄중 처벌을 시사했고, 이를 기초로 1990년,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게 된다.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강간이라는 범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엿볼 수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여성의 정조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인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고, 여성의 정조를 파괴한 가정파괴범은 엄하게 벌받아야 했다. 여기에는 여성 개인이 겪어야 할 고통이나 피해 같은 것이 배제되어있다.

많은 반성폭력 운동가들의 투쟁의 결과로서 1995년 강간죄의 표제가 ‘정조의 죄’가 아닌 현재의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게 되었고, 비로소 강간의 피해 객체가 가정이 아닌 여성으로 전환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005년부터는 성 범죄와 관련한 입법 요구들이 줄을 이었는데 대부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중범죄가 일어난 이후에 논의된 사례다. 2004년 밀양 사건, 2008년 조두순 사건, 2010년 김길태 사건, 2011년 광주 인화학교 사건 등을 거치며 전자발찌, 중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연장 및 폐지, 재범자 가중 처벌, 음주감경 배제, 성범죄에 대한 가중 처벌 등이 공론화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들에 후속 대책으로 논의된 사안들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보인다. 첫 번째는 피해자를 특수한 지위로 올려놓는다는 점인데 여론과 입법부 등은 공론화된 사건의 피해자를 주로 ‘보호받을 만한 약자’로 특정 지었다. 2000년 대 중반까지, 주요 사건들의 피해자는 주로 ‘어리고 유약한 여성’이었는데, 입법을 요구하는 여론이나 언론의 보도 등은 주로 이들의 씻을 수 없는 고통, 성폭력으로 인해 평생 갖고 가야 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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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흐름은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가해 범죄도 일탈적 범죄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성범죄 처벌에 관한 공론화가 일었을 때의 가해자는 주로 ‘싸이코 패스’나 ‘흉악범’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여론에 의해 정상 범주의 사람으로부터 유리되었다. 이들의 흉악한 가해행위와 피해자의 끔찍한 피해상황이 동시에 언론을 통해 적시되면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한 분노가 입법적 결과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 결과물로서 2010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공포되었다.

이 같은 논의들은 ‘성범죄는 아주 특수하고 흉악한 범죄’라는 보편의 인식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성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명백하고도 분명한 물리적 힘의 차이에서만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범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가해자를 낙인 찍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피해자의 중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처벌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의 구조적 강자로서의 보통 남성은 배제되었다. 그렇게 성범죄자에 대한 엄벌 요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보통 남성들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각도 견고해졌다. 저항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은 피해자는, 엄청난 고통이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는 피해자는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고, 반면 이러한 상황이 아니라면 가해자에게 엄벌을 내리는 것 자체가 재판부에게는 부담이었다.

이 때문에 보통의 가해자는 선처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주간 조선에 따르면 몇 해 전 대검찰청이 펴낸 양형 백서에는, 성범죄의 경우 형을 깎아주는 감경 요인이 반복적으로 고려되면서 형량이 낮게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해자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거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흔하게 고려됐다.

 

중범죄 사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성범죄

그간 사례를 보면 중범죄 사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성범죄 엄벌요구는 피의자 뿐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낙인도 수반했다. 피해자는 범죄 피해를 적나라하게 전시해야지만 비로소 피해자로서 인정받았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성폭력에 대한 2차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 피해에 대한 전시는 뭇 대중의 복합적인 시선을 불러 일으킨다. ‘강간 피해를 당해 불쌍한 여성’인 동시에 ‘정조를 유린당하고 인생이 파탄 난 여성’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국회에 제출된 주민등록법 개정안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편견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고, 피해자 본인 스스로도 피해 고통으로부터의 회복이 더딘 바…” (주민등록법 개정안 1813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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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 대한 낙인효과 때문에 성범죄의 신고율은 다른 중범죄에 비해 훨씬 낮다. 2016년 여가부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신체적 성폭력 피해에 대해  경찰에 신고한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다른 중범죄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치다.

피해자의 피해가 가해자의 엄벌에 대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생기는 또 다른 문제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피해가 가해자를 엄벌하기에 걸맞는 ‘보호가치 있는 피해’이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진정한 피해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탈락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법원의 온정주의적 판결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피해 여성의 피해 사례가 중하지 않으면,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명확한 권력관계가 있지 않으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수반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의 반복은 특수한 흉악범에 해당되지 않는 성범죄자를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더더욱 보통의 남성이 벌이는 일상생활에서의 성희롱 등을 처벌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SBS에 따르면 2017년 접수된 성폭력 범죄 2만 7천여 건 가운데 기소된 건은 40%에 불과하다. 영남대  ‘양형기준제의 현황 및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6월부터 2014년 5월까지 가해자가 성인이고 유죄 판결이 난 성범죄 1,700건의 형량을 집계한 결과, 52.4%(890건)에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는 피해자들이 성 범죄 피해사실에 대한 신고를 꺼리게 되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2016년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성범죄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이유로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를 든 비율이 50.1% 였고, ‘신고해도 소용 없을 것 같아서’를 든 비율이 20.9%였다. 중한 피해사실의 입증 요구가 오히려 범죄 사실을 숨기게 만들고 있다.

 

강간의 처벌은 곤란하게 하는 또 다른 문제, 항거불능

강간죄의 처벌을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는 또 있다. 바로 강간죄의 ‘항거불능’의 요건이다. 형법 제 297조는 강간죄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서의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하여 판례와 학계는 다음과 같은 수준을 요하고 있다.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 (2007.1.15, 2006도5979)


우리 형법은 폭력을 네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 최광의의 폭행 : 사람, 물건 등 그 대상을 불문하고 일체의 유형력을 행사하는 모든 행위. (내란죄, 소요죄에서의 폭행)

- 광의의 폭행 : 사람에 대한 직접, 간접적으로 유형력을 행사하는 행위. (공무집행방해죄, 특수도주죄, 강요죄에서의 폭행 - 2007도3584)

- 협의의 폭행 :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 (폭행죄의 폭행 - 75도2673)

- 최협의의 폭행 :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 행사 (강간, 강도죄에서의 폭행 - 91도546)

즉 강간죄에서 요구하는 폭행의 수준은 우리 형법이 규정하는 네 단계의 폭행 중 최고 수준이다. 이 정도의 폭행수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강간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청바지를 물리적으로 벗길 수 있느냐’, ‘왜 반항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냐’는 이야기는 바로 강간죄가 요하는 폭행 수준 때문에 나오는 물음들이다.

강력한 폭행피해 요구는 앞서 말한 ‘피해자는 심각한 피해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주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 구성요건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강간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데이트 강간이나, 위력를 이용한 강간(형법 제 303조에서 이를 규정하고 있으나 회사 등 일반적인 관계에 까지 적용하기는 제한적이다)은 강간이 아닌 강제 추행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다만 최근 실무에서의 경향은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경우에도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경우’라면 폭행, 협박이 있었다고 인정되는 것 같다. 법원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3급 지적장애인 A(15)양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정모(27)씨와 박모(23)씨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는데 처벌의 이유에 대해  ”피고인들은 A양이 지적장애로 인해 성관계를 거부하거나 저항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인정된다”며 항거불능 상태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015년 법원은 만취한 여성을 강간한 범죄의 항소심에서 ”피해자가 만취해 피해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하며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을 들어 가해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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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강간죄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법적 사각지대가 아직도 넓은 상황에서 ,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자신의 가해사실 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거부 의사가 명백한 상태에서 강간을 저지르는 사례에 ‘이것은 강간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결이 누적 되면서 남성들은 이런 행위를 범죄가 아닌 실수 내지는 낭만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유달리 ‘유죄‘를 선고하기 힘든 한국의 성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사법부의 변화‘든 ‘입법부의 입법‘이든 새로운 조처가 필요한 상황이다. 무작정 성범죄에 대한 ‘형량’만 늘릴 것이 아니라 범죄를 범죄로 신고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의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성’폭력이 아닌 성’폭력’으로

현행 형법상 성범죄는 ‘생명과 신체의 대한 죄’가 아닌 ‘자유에 대한 죄’로 분류되어 있다. 강간죄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범죄가 된다. 강간죄는 현재 형법 체계상 협박, 강요, 감금죄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이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해석에는 상당히 보수적인 시각이 곁들어져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국가에서 보호해야 할 법익 이지만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의무가 부과된 특수한 법익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피해 여성의 행실을 물었다. 옷차림을 지적했다. 어떤 폭력이 가해졌는지 보다는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지켜냈는지가 우선시 되었다. ‘강간이 무엇을 망쳤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한 가정을 파탄 냈다’에서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로 바뀌었지만 결국 두 대답은 아직까지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인다.

성을 수단으로 삼는 모든 폭력행위는 폭력으로 묶여야 한다. 성이라는 아주 특수하고 고귀한 것이 침범 당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수단으로 신체와 인격을 유린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폭력이기 때문에, 잔혹한 싸이코패스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권력 차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폭력을 가했을 때 비로소 성적 자기 결정권이 침해되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를 물어야 한단 것이다.

아울러 피해자의 모든 피해를 엄벌로서 갈음 하려는 행정편의적 발상도 버려야 한다. 공권력이 강간 가해자를 처벌 하겠다고 나서는 동안 피해자는 온갖 2차 폭력에 노출된다. 아무도 폭력 피해자에게 ‘맞을 짓 해서 맞은 것 아니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온전한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각종의 증명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상당수는 ‘가해자를 엄벌하기에 이르지는 않았다’며 끝이 난다.

어떤 성범죄 피해자도 그의 평소 행실이나 옷차림에 상관없이 그저 피해자로만 남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가해자도 그의 악마 같은 성격이 부각되거나 평소의 성향이 부각될 필요 없이 그저 가해자로서 취급을 받아야 한다. 성범죄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어떤 특별한 사정이 없이도 신고와 처벌이 이뤄질 수 있는 범죄로 취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