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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미래, 에피스테메, 문빠

한국 민주주의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도약할 전기

ⓒhuffpost

“문빠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모두 적폐로 몬다”. 문빠(문재인에 대한 열성 지지자)에게 제기되는 대표적인 비판이다. 분명 문빠가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를 모욕하고 인격적으로 비하한다면 그건 문빠의 잘못이다. 자신들과 작은 의견의 차이라도 보일라치면 바로 “적폐”로 모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는 이들 역시 이 사회의 동료 시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관용의 원칙에 어긋나는 모습이다. 우리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관용의 한계 너머에 있는, 진정 “적폐”라 불러 마땅한 불의, 부패, 부도덕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러나 “적폐”라는 표현을 통해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닌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 찍는 것, 그 상대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결정할 동료 시민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관용에 대한 토마스 스캔런의 이론 참조).

그러나 그러한 조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부 문빠들이 다소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문빠 현상을 한국 민주주의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도약할 전기로 평가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나의 평가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특히 1인 1표로 대표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절차가 그 사상적 뿌리에 있어 상대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의 씨앗을 담고 있다는 관찰에서 비롯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특성 상, 정치적 문제에서는 정답이 없다거나 혹은 문재인이나 박근혜나 다를 게 뭐가 있냐는 식의 허무주의, 냉소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으로 상존한다는 말이다.

타지의 친구 여럿이 철수의 동네를 방문하여 식사장소를 결정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어느 식당이 맛집인지에 대한 정답에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무엇일까? 각 개인들이 민주적으로 등가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식당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아 보인다. 친구들이 모인 지역이 철수의 동네인 이상, 그 동네의 맛집 정보는 철수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수가 그 동네 맛집에 대한 에피스테메(episteme, 참된 앎)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좋은 맛집을 찾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의사 결정 절차는 각 개인에게 등가의 결정권을 주는 민주적 방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지닌 철수의 의견에 가장 큰 가중치를 주는 방식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다. 민주적 투표로 결정하기 보단 웬만하면 철수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맞다는 말이다. 민주적 의사 결정 절차가 어느 식당이 동네 맛집인지에 대한 정답을 찾는 절차로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 국가로서 대한민국은 국가의 대소사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한다. 비단 국가뿐만이 아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초등학교 교실에서, 동호회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한 의사 결정은 일상의 일부로 당연시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민주적 절차에서 개인의 지식, 경험, 덕성 등은 철저히 무시되고 각 개인에겐 오로지 N분의 1만큼의 결정권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전문가도 한 표, 정치에 완전히 무지한 이도 한 표를 행사한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민주적 절차는 진리나 정답을 찾는다는 목적에 비춰 결코 효율적인 절차라 할 수 없다.

 

ⓒleungchopan via Getty Images

 

이 지점에서 민주적 절차를 옹호하는 이들은 인간사, 특히 인간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나 정답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나 동의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많은 이들이 합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그러한 합의나 동의가 진리라면 좋겠지만 진리가 아니라도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2012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박근혜가 훌륭한 정치지도자인지 여부에 대한 팩트 혹은 진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수가 그렇게 믿고 투표를 했다는 것이고, 민주주의 하에서 우리는 그 투표 결과에 승복하였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토론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언급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얼마 전 TV 에서도 어느 토론자가 MB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정치보복이 아니라 주장하며 그 논거로 국민의 60% 이상이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 아니라는 의견을 갖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언급하는 것을 봤다. 일견 그 토론자는 여론조사 결과가 MB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중요한 고려사항이라 여기는 듯하다. 혹은 그 토론자는 한발 더 나아가 MB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실로 정치보복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MB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고, 그런 생각이 진리인지 여부는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2012 대선 당시 박근혜가 실제로 훌륭한 정치지도자인지 여부보다 다수의 국민들이 박근혜가 훌륭한 정치지도자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정치적 삶에서 훨씬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합의되거나 동의되지 않은 참보다 합의되고 동의된 거짓을 더 우선시하는 제도이다. 왜 현대 인식론의 거장 앨빈 골드만이 민주적 의사 결정은 진리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자신의 진리주의적 인식론(veritistic epistemology)과 상충한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진리보다 합의와 동의를 우선시하는 민주주의의 연원은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정치의 영역에서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에피스테메는 불가능하다거나, 혹은 진리가 존재하고 에피스테메가 가능하더라도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그에 접근할 수 없다거나, 혹은 에피스테메가 가능하고 우리가 그에 접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정치적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에피스테메는 가능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회의주의적 시각에서 굳이 진리를 추구하는 집합적 의사 결정 절차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사 결정 절차는 시민들이 그 결과에 승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절차, 즉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절차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런 사상사적 배경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과 함께 탄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의 관찰과 맥이 닿는다. BC 6세기경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소피스트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전통과 질서는 신적인 존재에 의해 확립된 신성하고 불변적인 진리였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그러한 구질서와 전통에 대하여 의심하고 회의하는 법을 가르쳤고, 그러한 그들의 가르침은 이후 철학과 민주주의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두 금자탑을 이룩했다고 카스토리아디스는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언명으로 잘 알려진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신성한 진리로 포장된 권위와 전통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도전을 잘 보여준다. 각 개인은 각각의 고유한 진리를 갖는다는, 그래서 객관적·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은 도시국가의 운명은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가 아닌 대중들의 집단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믿음은 민주주의를 통해 현실 정치 속에서 구현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한 배경엔 이처럼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 에피스테메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이 끔찍이 존경하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상황을 목도한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호의적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절대적 진리, 그리고 그에 대한 에피스테메의 가능성을 긍정한 그의 철학이었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진리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에피스테메가 가능하며, 그것이 우리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하다는 플라톤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우매한 군중들에 의한 우민 정치 다름 아니었다. 플라톤이 염원한 철인 정치는 어리석은 군중들의 합의가 아니라 객관적 진리가 군림하고 통치하는 정치였고, 그는 그런 정치가 진리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소유한 철학자가 왕이 되는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점심 식사를 할 식당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한 한 철수가 그와 그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왕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의 사상적 연원이 진리 회의주의라는 것을 인식할 때, 왜 정치에 대한 상대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상시적인 위협인지 납득이 되고도 남는다. 정치에선 참과 거짓, 옭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오직 누가 다수의 지지를 얻느냐 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공공선에 대한 숙고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부정부패, 가짜뉴스, 흑색선전 등에 대한 가치판단은 흐려진다. 자신의 발언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개의치 않고 오직 지지율만 높이면 된다는 홍준표식의 레토릭은 그 극단의 모습이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흐름의 배후에도 이런 상대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상대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제안한다. 민주주의는 받아들이되 그것의 사상적 배경에 해당하는 진리 회의주의를 거부하자는 말이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의 구분이 가능하다 믿고, 각 정치적 사안에 대해 에피스테메를 얻기 위하여 치열하게 분석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민주 시민의 덕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바람직한 민주 시민의 자세는 진리를 찾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는 학자의 자세와 흡사하다(이런 이유로 나는 “학문에 대한 학문”으로서 토마스 쿤이나 칼 포퍼의 과학철학이 민주주의 연구자들에게, 특히 민주주의의 정치인식론(political epistemology)적 측면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믿고 있다).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자가 진리를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학자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진리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에피스테메가 가능하다고 믿을 때, 그렇게 진리 회의주의를 극복할 때, 그 때 정치적 이슈에 대하여 더 참되고, 더 공익적이고, 더 정의로운 해법을 찾는 시민들의 노력은 비로소 그에 합당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일각에서 “문빠는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혹은 “문빠는 자신들이 정의와 진리를 독점한다고 믿는다”고 말하며 문빠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있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새로운 학설을 창안하고 그 학설을 두고 열띤 논쟁과 비판을 주고받는 학자들의 활동은 학문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학자들이 그러한 논쟁과 비판을 주고받는 이유는 그들이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으로 학자들이 이견을 용납하고 자신의 학설만이 진리라고 믿지 않는다면 논쟁도 비판도 학문의 발전도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의 발전 역시 정치적 에피스테메를 향한 시민들의 거침없는 탐구와 열띤 논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믿음을 진리라 확신하고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모습,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논쟁하고 비판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그것이 공적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나아가 동료 시민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만 있다면) 건강한 민주주의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문빠 현상에서 상대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의 위협을 극복하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보는 이유이다.

*이 글은 교수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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