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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02일 17시 39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02일 17시 39분 KST

인조노동자의 의미와 헬라나의 시간

연재 - 한국 SF 연대기 (4)

한국에 소개된 네 번째 SF는 1924년에 쥘 베른의 『달나라 탐험(Autour de la Lune null)』(1869)을 신일용이 번역했다고 알려진 『월세계 여행』이지만, 출간이 되었다는 기록만 확인될 뿐 텍스트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현재 김교제의 『비행선』(1912) 이후에 확인된 한국의 SF는 박영희(朴英熙)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 R.U.R)』(1920)을 중역한 『인조노동자(人造勞働者)』라고 할 수 있다. 『철세계』가 금서 조치를 당하고, 이후에 대중 소설이라는 명분으로 『비행선』이 소개되고 난 후에 무려 십여 년이나 더 지나서 소개된 작품은 당시에 세계적인 유명세를 구가하던 웰즈의 작품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R.U.R』이었던 것이다.

물론 『R.U.R』 역시 당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작품이었다. 희곡으로 쓰인 이 작품은 1921년 1월 25일에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되자마자 성공을 거두며 차페크를 체코 최고의 극작가로 부상시켜 주었고, 그 명성을 토대로 이듬해 뉴욕과 런던에 진출했다. 그리고 진출한 해 뉴욕에서만 184회 연속 공연이 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극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카렐 차페크, 김희숙 역, 203-204쪽 참조.)

뉴욕 씨어터 길드의 <R.U.R> 공연 중 2막의 로봇들의 반란 장면 (1928~1929)

이러한 유명세 가운데 일본에서도 무대에 올려졌고, 당시의 한국 지식인들과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 또한 이를 관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정보는 극작가 김우진이 일본의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상영된 <인조인간>을 관람한 뒤 남긴 글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우진, 20쪽 참조.) 이러한 정보들로 미루어 볼 때 『R.U.R』이 1920년대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킨 작품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관심은 한국에서도 제법 활발하게 나타났다. 극을 처음 한국에 소개한 것은 이광수(李光洙)였다. 그는 작품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서 ”기계적(機械的) 문명(文明)에 노예(奴隸)가 되며 마츰내 멸망(滅亡)하는 날을 묘사(描寫)한 심각(深刻)한 풍자극(諷刺劇)”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광수, 15-16쪽.) 이와 같은 관심이 모아졌었지만, 텍스트의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박영희의 『인조노동자』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개벽⟫에 연재된 박영희의 「인조노동자」

『인조노동자』는 1925년 2월 1일 발간된 《개벽》 제56호부터 같은 해의 5월 1일 발간된 제59호까지 총 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김종방은 1925년 5월에 원작 3막의 내용만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고 밝혔지만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모든 텍스트가 번역, 소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다만, 서막과 1~3막으로 나뉘어있는 원작과는 달리, 서막을 따로 나누지 않고 1~4막으로 통합된 구성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뉴욕과 런던에서 무대에 올려진 극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스즈키 젠타로(鈴木善太郞)의 「로봇(ロボット)」(1924)을 참고하여 번역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방이 그의 연구에서 『인조노동자』의 원전을 찾기 위해 우가 이츠오의 「인조인간」(1923)과 스즈키 젠타로, 그리고 박영희의 극본에 나타난 대사와 지문을 비교하여 스즈키 젠타로의 번역본을 참조했을 가능성에 대해 설명한 것(김종방, 123-126쪽 참조.)에 원작과 다르게 막이 구성되었다는 정보를 통합하면 박영희의 번역은 스즈키 젠타로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더욱 힘을 얻는다.

여기까지의 정보를 정리하고 나니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박영희는 왜 제목을 원작 그대로인 『R.U.R』이나, 원전으로 삼았던 스즈키 젠타로의 『로봇』이 아니라 『인조노동자』라고 번역했을까? 사소한 것 같고,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지 않은 이 제목 선정에 사실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5년 만에 한글로 번역되어 당시에 가장 활발하게 발간되고 있던 잡지에 수록된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박영희는 연재 서문에서 ‘로봇(robot)’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로뽀트‘는 ‘노동자’ 혹은 ‘무임노동자‘란 말이며 또 막코안氏는 ‘기계가 만들어서 생명을 주는 노동자’라고 해석한다. 이 말은 보헴미아語다.

로봇을 ‘노동자’ 혹은 ‘무임노동자’라고 번역한 것은 로봇이란 단어가 차페크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는 체코어 ‘robota’ 즉 ‘노동’ 혹은 ‘부역‘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본질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서문에 설명을 할 것이라면 ‘로봇’ 혹은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원제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굳이 우리말로 풀어서 의미를 부여했는가 하는 의문이 중첩된다. 앞서 번역된 일본 번역본들이 ‘로봇‘이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인조인간’ 한자어로 번역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의구심을 가중시키는 부분이다.

로봇이 모사한 대상이 단순하고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노동자로 번역된 것은 일견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의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지만 박영희가 KAPF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대입해보면 해석의 방향을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시켜서 가져갈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사회주의에서 로봇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배경인 ‘과학(科學)’에 대해 취하고 있는 시각을 보면 박영희가 로봇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했는지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물사관과 잉여 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는 비밀을 폭로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 발견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F. 엥겔스, 김재기 편역, 292쪽.)

엥겔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기존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던 부조리를 들춰냈고, 그로 인해 사회주의 자체가 세계의 비밀을 이해하는 하나의 거대한 방법론이 되었다고 의미 부여하고 있다. 과학을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 바라보지 않고,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의미를 확장할 때 사회주의는 그 큰 의미에서의 과학에 부합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과학의 의미는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기존의 세계가 가지고 있던 불합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의미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영희는 차페크의 작품을 통해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로서의 로봇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무권계급(無㩲階級)과 유권계급(有㩲階級)의 차이에서 나타난 부조리를 지적하고 이를 훼파하기 위한 혁명을 계몽하려고 했다. 그가 평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에서 드러난 무권계급은 로봇으로, 유권계급은 인간으로 해석하고 로봇들의 혁명적인 행동을 무권계급으로 전락해 버린 노동자들이 제도의 부조리를 혁파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영희, 1925.8.1.)

 

헬레나는 갈에게 로봇들이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작품 내에서 헬레나의 역할은 박영희가 보기에 혁명적이고 주도적인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무권계급으로 상징되는 로봇들의 처지를 살피고, 그들을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헬레나라는 인물은 단순히 이야기를 이끌고 문제를 촉발시키는 문제적 인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메시지를 견인하는 인물로 해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봇들만 남아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특정 인간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헬레나(작품에서는 인간 헬레나와 그를 모방해 만들어진 로봇 헬레나가 등장한다)가 인간들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로봇들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열 가능성, 마치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처럼 상징되는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박영희의 해석 때문인지 『인조노동자』에서는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하나 발견되는데, 이 부분은 꽤나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원작에서 헬레나는 로봇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로섬 유니버설 로봇에 왔다가 도민과 결혼하여 10년이란 시간을 지내게 된다. 전자의 설정이 서막에 걸쳐 나타나고, 1막이 시작하면서 결혼을 한 지 1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헬레나 : 해리,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도민 : 맞춰봐요.
헬레나 : 내 생일? 아냐! 무슨 경축일?
도민 : 그것보다 더 좋은 날이오.
헬레나 : 정말 모르겠어. 빨리 얘기해줘요.

도민 : 당신이 이곳에 온 지 딱 10년째 되는 날.
헬레나 : 벌써 10년이나 됐어요? 바로 오늘이? 나나, 미안하지만...

(카렐 차페크, 김희숙 역, 71쪽.)

로봇들에게 닥친 불합리한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일종의 잠입을 시도한 헬레나의 초반 설정과 그가 보여주는 로봇들에 대한 감정의 이입을 감안했을 때, 그가 아무런 성과 없이(물론 헬레나의 끈질긴 요구로 인해서 갈 박사가 로봇들에게 감정이 생기게 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지만) 10년이란 시간을 도민을 비롯한 로섬 유니버설 로봇의 일행들과 보낸 것은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의 설정은 갈 박사가 로봇들에게 감정을 넣는 실험의 진척을 위한 시간 설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부당한 세계의 구조를 반박하는 것을 중요시했던 박영희는 이러한 시간 설정에 변화를 준다.

(떠민이 드러왓다)

헤레나 : 그 그런데 이 꼿은 웬 것이예요?

떠민 : 그 어듸 마처보면 용하지.

헤레나 : 그 글세. 그러치만 내 생일날도 안인데.

떠민 : 그 그보다 더 조흔 일이 잇지.

헤레나 : 그 나는 몰으겟서요. 말슴해 주세요. 네.

떠민 : 헤레나가 여긔 온지가 오날이 5年 되는 날이란 말야.

헤레나 : 5年? 오날이? 아이걀 , 참!

(차페크, 박영희 역, 「인조노동자」, 《개벽》 제57호, 1925.3.1, 62-63쪽.)

박영희는 『인조노동자』에서 헬레나가 로섬 유니버설 로봇에서 떠민(도민)들과 지낸 시간이 10년이 아니라 5년이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는 박영희가 참고했다고 여겨지는 스즈키 젠타로의 번역본이나, 스즈키 젠타로가 참고한 영국과 미국의 공연 대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로봇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졌던 헬레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10년이란 시간을 도민 일행들과 지냈다는 것은 부적합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원작에서 헬레나가 아닌 로봇들에게 영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실험에 소요된 물리적 시간이라는 10년의 함의를 무시하고, 그 시간을 5년으로 단축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뉴욕 씨어터 길드의 <R.U.R> 공연 중 헬리나(左)와 도민(右)

우선 박영희가 헬레나에 부여한 의미들은 그가 이후에 발표한 글들을 통해 좀 더 확연해진다. 그는 1926년에 잡지에「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이라는 글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인조노동자』에 대한 자신만의 에필로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다. 박영희는 스스로 이 글을 쓴 목적이 ”인류운동의 녀성 소개”라고 밝히면서 헬레나를 언급한다. ”인류 행복을 위해 학대 밧는 인조로동쟈의 해방을 위해 아름답게 희생되고 말엇다. 그럼으로 헤레나의 아름다운 생명의 힘은 살엇다” (박영희, 1926.2, 참조.)라고 의미 부여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박영희가 이 작품을 어떤 목적으로 해석하고 번역했는지와 그를 위해 헬레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원작에서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면모가 강조된 (원작에서는 그것을 인간이 가지는 특징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헬레나가 박영희의 작품에서는 치밀한 계획성을 가진 여성 운동가로 변모한다. (한민주, 431쪽 참조.)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에서 ”그는 오 년 동안에 그 회사의 모든 비밀과 인조로동쟈를 만드는 법까지 알려고 하엿다.”, ”헤레나는 오 년 동안이나 정이 든 떠민보다는 인류 전톄의 행복을 위하여 학대 밧는 인조로동자의 해방을 위해서만 그는 그의 몸을 희생하려 하엿다.” (박영희, 1926.2, 참조.)고 이야기 한다. 이 정도면 그가 왜 이 작품을 번역했는지, 그리고 헬레나의 시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한 의도는 무엇이었는지가 제법 자명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 카렐 차페크의 『R.U.R』을 보면서 노동에 대한 문제를 상기했던 것은 비단 박영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창작될 당시의 체코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했고, 작품의 전 세계적인 확장과 사회주의 이론의 대두는 그 연관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공연을 관람한 김우진도 작품을 소개하면서 주제는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부인, 모성의 高唱, 노동의 신성”(김우진, 22쪽.)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로봇을 통해 드러난 노동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은 당시에 일반적인 것이었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박영희가 작품을 대했던 가장 근본적인 시각은 단순히 노동 문제에 대해 기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와 안위를 위한 것이라는 허위의식에 의해 조립된 세상의 구조에 대한 고발의 목적이라는 철학적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명진, 202-203 참조.) 그가 본 로봇들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피조물이 아니라 구조속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한국이 국제적으로 처한 상황과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그 고발을 여성인 헬레나를 통해 이루려 했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마이너리티에 의한 노동자 혁명.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박영희는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을 붙이고 헬레나의 10년을 구조에 순응해 안주한 시간이 아니라 투쟁을 위해 노력한 시간인 5년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확실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R.U.R』은 발표된지 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돼 활용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SF가 가지고 있는 도구적 성격과 프로파간다로서의 성향은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알퀘스트를 제외한 인간들을 모두 제거한 로봇의 우두머리인 라디우스가 ”더 이상 인간은 없다. 로봇들이여, 일터로! 전진!”(카렐 차페크, 김희숙 역, 154쪽.)이라고 외치는 부분은 결국 혁명 이후에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있지 못했던 당대 사회주의의 한계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페크 역시, 그러한 막막함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창세 직전과 같이 되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 카렐 차페크, 김희숙 역, 『로봇』, 모비딕, 2015.
  • 김우진, 「築地小劇場에서 人造人間을 보고」, 《개벽》 제72호, 1926.
  • 김종방, 「1920년대 과학소설의 국내 수용과정 연구 - <80만 년 후의 사회>와 <인조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의연구』 제44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11, 117-146쪽.
  • 박영희, 「文壇의 鬪爭的 價値」, 《조선일보》, 1925.8.1.
  • 박영희, 「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 《신여성》, 1926.2.
  • 이광수, 「인조인(人造人) : 보헤미아 작가의 극」, 《동명》 제31호, 1923.4.
  • F. 엥겔스, 김재기 역,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 F. 엥겔스∙K. 마르크스, 김재기 역,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거름, 1991, 292쪽.
  • 송명진, 「近代 科學小說의 ‘科學’ 槪念 硏究 - 朴英熙의 「人造勞動者」를 中心으로」, 『어문연구』제42권 제2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4, 185-207쪽.
  • 한민주, 「인조인간의 출현과 근대 SF 문학의 테크노크라시 - ‘인도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제25호, 한국근대문학회, 417-449쪽.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