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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일장연설

일장연설이라는 건 너무나도 한국적인 무엇

  • 김도훈
  • 입력 2018.03.02 10:21
  • 수정 2018.03.02 10:37
ⓒhuffpost

이상화 선수는 아니라고 했다. 경기 당일 대한빙상경기연맹 고위급 임원이 선수단을 방문해 선수들을 깨웠다는 스포츠평론가의 증언이 나온 다음날이었다. 당일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는 저녁 8시에 열렸다. 선수들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새벽 2~3시에 잠들어 점심때 일어날 계획이었다. 임원은 굳이 아침 9시에 선수단을 방문했다. 이상화 선수도 깨야만 했다.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일장연설을 듣고 다시 흩어지라고 그랬다는데, 임원은 처음에 그랬다고 해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하냐!’”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냐!

난리가 났다. <중앙일보>는 해당 임원의 이름을 밝혔다. 소셜미디어에는 빙상연맹에 대한 비난이 B52(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가 일본 도쿄에 떨어뜨린 폭탄처럼 격렬하게 떨어졌다. 결국 이상화는 기자회견에서 해명해야만 했다.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오히려 제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방문하신 것 같았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그게 이렇게 들렸다. “길게 설명하면 (곤란해지니까) 안 하고 싶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상화가 어떤 의미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대충 눈치채셨으리라.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한국의 아저씨들은 일장연설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까? 모든 아저씨가 일장연설을 한다. 과장도 하고, 부장도 하고, 국장도 하고, 임원도 하고, 대표도 한다. 아니, 한국의 아저씨들은 아마 주임이 되자마자 사원들을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시작할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에게 “왜 아재들은 일장연설을 좋아할까?”라고 물었다. 답변이 돌아왔다. “왜냐면 그분들은 외로운 나머지 모두가 모여서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는 척하는 걸 보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거든.”

슬퍼졌다. “그분들은 외로운 나머지”라는 말 때문이었다. 아마 임원급 아저씨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젊은 직원, 젊은 선수들이 자신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일장연설을 하는 순간만은 다르다. 그들은 당신을 둘러싼 채, 혹은 올려다본 채 당신 말에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할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도 외롭지 않다. 그 순간 당신은 스스로 의심하던 당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Kiyoshi Hijiki via Getty Images

 

나 역시 영락없이 40대가 되고 말았다. 이 40대라는 나이는 기대보다 꽤 귀찮은데, 30대에는 할 필요가 없었던 의무가 늘어나는 탓이다. 그중 하나가 역시 일장연설이다. 편집장인 나는 회식 자리에서 건배 제의를 해야 하고, 건배가 끝나면 일장연설을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모티베이션(동기부여) 스피치’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국 회사와 술자리는 구글 오피스나 아마존 사내에 있는 바가 아니다(아마존 사내에 바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아마존에는 뭐든 있으리라 믿고 싶다). 하여간 미국 스타트업 스타일의 스피치를 했다가는 여러모로 어색한 순간이 될 것이 틀림없다. 결국 일장연설이라는 건 너무나도 한국적인 무엇이다. 하는 사람에게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별 의미가 없어야 한국적 일장연설은 진정으로 완성된다.

차라리 꼰대처럼 말할걸

지난해 말 송년회에서 결국 일장연설을 하게 됐다. 어떻게든 한국적으로 해내자 마음먹었다. ‘올해에도 열심히 했으니 내년에도 파이팅합시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누구도 짜증 내지 않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루만 지나면 잊힐 문장이었으니까. 대신 내 입에서는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여러분 저도 40대는 처음이고요, 편집장도 처음입니다. 부족합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걷어찼다. 차라리 그냥 꼰대처럼 말할걸. 나는 정상적인 한국의 아재가 되기에는 아직 더 극한 훈련이 필요한 인간이다. 내일 아침에는 8시 정각에 출근해서 이렇게 단체 카톡을 날려야겠다. “해가 중천에 뜨고 있는데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하냐!”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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