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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빠의 커밍아웃

딸 아이를 통해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

ⓒhuffpost

어느 날 아이는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이 있다고 말했다.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이가 성장해서 어떻게 살아갈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레즈비언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의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냐, 어떤 사람이냐, 사귄지는 얼마나 되었냐, 재미있냐 라고 물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아이는 늘 또래의 평범한 삶을 답답해했다. 고교시절 남들이 다 하는 방학 동안의 보충수업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시험기간 중에도 좋아하는 밴드 공연을 보러 서울로 춘천으로, 천안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아이에게는 부모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조차 갑갑했을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아무리 넓게 바운더리를 쳐도(쳤다는 착각) 그 경계 밖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 날 이후 만날 때마다 아이의 연애 얘기를 들었다. 사진을 보여 주고, 그 사이에 어떻게 지냈고, 무슨 일 때문에 서로 싸웠는지 등 본격적으로 연애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내는 이러저러한 일로 아이의 파트너를 만날 일이 있었다. 나 역시 궁금했지만, 좀처럼 만날 기회가 오지 않았다. 2014년 12월 초 서울시민 인권헌장 문제와 관련 박원순 서울시장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한 항의로 무지개행동이 서울시청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무지개행동 농성단에 참여하고 있던 아이는 아내와 나에게 지지 방문을 요청했다. 우리는 기꺼이 찾아가 짧은 지지 연설을 하고, 열기 가득한 현장에서 같이 구호를 외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Alexander Spatari via Getty Images

그 날 아이의 파트너를 처음 만났다. 조금 있으면 일을 마치고 도착할 거라는 얘기에 첫 대면을 앞둔 나는 다소 긴장했다. 만나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어수선한 와중에 아이의 파트너가 시청 로비에 나타났다. 그는 나보다 더 긴장한 듯했다. 아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영화에 나오는 조폭처럼 90도 인사를 했다.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편안하게 얘기하고, 사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농성장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즐겼다.

레즈비언의 아빠라고 해서 힘들거나 괴로웠던 경험은 없다. 오히려 그러지 않았으면 누리지 못했을 즐거운 추억이 많다. 아이는 커밍아웃하고 곧바로 성소수자 운동에 참여했다. 퀴어영화제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나를 초대했다. 아내는 다른 일이 있어 혼자 가야할 상황이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다 성소수자들을 만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많이 망설였다(내 아이가 성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어쩔 수 없었던 불편감이랄까?). 그러나 결국 가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행사 관계로 부산하게 돌아다니느라 아빠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아이가 소개해 준 다른 성소수자들과 같이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성소수자들의 태도는 친절하고 세련되었다. 그 자리에서 처음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을 만났다.(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 동성결혼식에 참석해 달라고 했다. 귀한 초대에 응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

서울시청 광장의 퀴어 축제도 생각난다. 광장을 가득 메운 성소수자들은 유쾌하고 생기발랄했다. 그에 반해 광장을 에워싼 호모포비아들은 거친 목소리로 증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2017년 가을, 처음으로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참석했다. 전국에서 모인 성소수자 부모들이 가슴을 털어놓고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했다. 슬기롭게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힘이 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트랜스젠더 부모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픔에 공감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쳤다.

관련 모임에 참석하면서 무엇보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간 내가 관심을 가져왔던 세상사와는 다른 다양한 얘기들을 접하게 되었다.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이를 통해 배웠고, 배우고 있다. 아이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레즈비언인 딸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이가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진 것은 없다. 본인은 그렇게 살면 되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별히 커밍아웃 할 일도 없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성소수자 운동에 뛰어들고 매체를 통해 이름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해갔다. 혹시 친척이나 친구 중에 우리 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우리 부부나 본인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경로로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되었다. 아이도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대화하던 도중 본인이 먼저 그런 얘기를 했다. 아빠엄마가 판단해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 주면 좋겠다고...

ⓒPhotos by R A Kearton via Getty Images

기회는 비교적 빨리 찾아왔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선배가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지역에서 시민사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이 선배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글을 이따금 페이스북에 퍼 나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일본에서 손님이 찾아와 그 선배를 포함해서 일행이 동해안으로 짧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가는 도중 자녀들의 연애, 결혼 등 지극히 상투적인 말을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기회에 내 딸의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우리 아이가 레즈비언이다. 지금 애인과 함께 잘 살고 있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선배가 퍼 온 글을 보면 불편하다.’ 그 후 얘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는 충격을 받았고, 잠시 할 말을 잊었으며, 변명 비슷한 얘기를 몇 마디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우리 아이와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선배의 페이스북에서 더 이상 그런 성격의 글은 찾아볼 수 없다.

30년이 넘은 부부 동반 모임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모임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하는 자녀들이 생기고, 자녀의 혼사 문제가 주요 화제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올 여름 모임에서는 한 친구가 우리 아이에 대해 남자친구가 있는지, 결혼은 언제 시킬 것인지를 집요하게 물었다. 더 이상 화제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내는 아이가 레즈비언이고 지금 애인이랑 같이 살고 있다고 얘기했다. 모두들 많이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얘기가 오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에 빠져버린 것이다. 모임이 파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자리에 누운 친구가 물었다. 아까 한 얘기가 정말이냐고.

두어 달 후, 모임에 참석했던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용건은 내비치지 않고 시시한 근황을 몇 마디 물은 다음, 아이가 레즈비언이라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후 그 친구들을 만나면 오히려 내가 먼저 그 얘길 듣고 어땠느냐고 묻는다. 대부분 특별한 편견은 없다고 말한다. 씩씩하게 성장해온 모습을 보았기에 앞으로도 잘 살아가리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성소수자는 우리 중 누구와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잘 알고 지낸 선후배나 친구의 아들딸일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며 동료 시민이기도 하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당연하다고 믿었던 생각은 바뀌어야 하고 바뀔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글쓴 이 : 모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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