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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22일 14시 01분 KST

예술계 성폭력 ‘방조자의 덫’…조직보호 논리로 ‘2차 가해’

공연계는 어쩌다 '집단 최면'에 걸려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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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이윤택씨의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이씨의 성폭력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면서 우리 사회가 성범죄에 대해 ‘방조자의 덫’에 걸려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직 보호의 논리로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2차 가해’가 만연해 있었다는 반성이다.

이윤택씨의 성추행·성폭행은 수많은 ‘방관’들 속에 지속돼왔다. 방관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연극’이라는 가치가 앞세워졌다. 최초 폭로자 중 한 사람인 김보리(가명)씨는 ‘최고 연극집단의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분이 그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해 사실을 폭로한 홍선주씨는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이윤택) 선생님에게 누가 되는 것이라며 여자 선배들이 여자 후배들을 질책하고 비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성폭력을 감내하는 것을 ‘연극’과 ‘연희단거리패’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이런 ‘집단적 방조’는 조직 논리와 예술계의 특수성이 결합된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한 개인이 모든 공적 지위를 겸임하는 예술계의 권력구조를 지적한다. 이 대표는 “보통 대가로 불리는 예술가들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고, 현장에서는 감독이고, 공적으로는 기관장인 경우가 많다. 사실상 해당 분야의 상징권력을 독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윤택씨는 극단의 수장과 극장의 대표, 교수 등을 겸임하며 ‘연희단거리패’라는 조직과 동일시됐다. ‘이윤택의 흠결은 연희단거리패의 흠결이고, 이는 곧 연극계의 흠결’이라는 내부 논리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부산 동구청 제공
지난 19일 오전 부산 동구 초량동 초량초등학교 옆 이바구길에 있던 이 연출가의 기념동판이 철거되고 있다.해당 동판은 이바구길 '인물사 담장'에 설치된 기념물로 이 감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3년 설치됐었다.

예술계의 특수성이 상습화된 성폭력의 ‘수위’를 끌어올렸다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조직 보호 논리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와 은폐라는 보편적인 대응으로 연결됐다.

앞서 임은정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건 등 검찰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려 했지만 ‘왜 조직을 흔들려 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2008년 민주노총 간부의 조합원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 논리로 조직적 은폐 시도가 있었다. 이런 강요된 침묵이 성폭력 문제가 반복되는 ‘토대’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이에 ‘방조자의 덫’에 빠지게 하는 구조 자체를 허물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성미 대표는 “예술계의 경우 교수가 심사위원을 겸임할 수 없게 한다든가, 활동가와 교수의 영역을 분리시킨다든가 하는 제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폭력의 근간이 권력의 위계구조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권력의 분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폭력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미퍼스트’ 운동의 확산 역시 ‘침묵의 나선’에 균열을 내는 주요한 요소다.

21일 연희단거리패의 조직적 은폐 시도를 폭로한 연극인 오동식씨의 추가 폭로가 대표적이다. 대학로의 연극 관객들도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이들은 ‘관객이 응원합니다’라는 이름으로 오는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계 미투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스태프와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이진희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최근 연극계 주변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미퍼스트’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덜 들려온 남성 내부인의 성찰이 오늘 오동식씨의 폭로를 계기로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수희 부장은 “침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사회 구조에서 연대를 표현하고 연대체를 꾸린다는 것은 변화의 신호탄이다. 이런 연대의 움직임이 구조의 변화를 위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