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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08일 15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08일 15시 40분 KST

어느 날 갑자기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누가 벙커에 들어갈까?

요리사, 엔지니어, 벙커 설계자, 정신과 의사, 목수, 어부, 피아니스트, 공무원...

huffpost

어느 날 갑자기 핵폭발이 일어났다 치자. 후세를 위해 30년 동안 벙커에 들어갈 사람을 직업별로 골라야 한다. 과연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으면 좋을까? 여기까지 아들 녀석이 다니는 초등학교 사회 시간 토론 주제였다고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직업을 하나씩 고르고 자신이 고른 직업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요리사, 엔지니어, 벙커 설계자, 정신과 의사, 목수, 어부는 살아남았다. 반면 피아니스트, 행정공무원, 산부인과 의사, 경찰관, 농부는 살아남지 못했다. 사실 생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생존자들의 직업이 꼭 필요해서 살아남은 건 아니다. 대개 반에서 인기 있는 아이들이 고른 직업은 살아남았고,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아이들이 고른 직업은 살아남지 못했다.

2012

아들 녀석은 처음에는 행정공무원을 골랐는데, 행정공무원이 뭔지 몰라서 피아니스트로 바꿨다고 했다. 하지만 격렬한 논의 끝에 피아니스트는 안타깝게도 벙커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미 정신과 의사를 뽑았으므로 피아니스트는 필요 없다나 뭐라나. 아들 녀석은 아이들의 선택을 못내 아쉬워했다. 사람들이 30년 동안 벙커에 갇혀 있으면 미쳐버릴 텐데, 정신과 의사보다 피아니스트가 훨씬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정신과 의사도 사람들의 기분은 못 고쳐주지만, 음악은 다르다고 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음악은 심심할 때마다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제법 그럴싸한 얘기였지만, 아이들한테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JoeLena via Getty Images

성서의 노아처럼 만일 내게 결정권이 주어졌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맹신을 강요하는 종교 지도자, 온갖 악행을 일삼고 주일에만 회개하는 신도, 자신의 판단은 늘 옳다는 착각에 빠진 고위공직자, 걸핏하면 선량한 피해자 행세하는 재벌 총수, 공정하지 못한 판사, 진영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종사자는 제외했을 것 같다. 대신 피아니스트는 살아남아야 한다. 아들 녀석이 피아니스트를 골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앞서 열거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보다 아들 녀석의 엉터리 같은 피아노 솜씨가 낫겠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