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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뇨기과 병원이 ‘미혼 무자녀 남성’ 정관수술 거부하는 이유

"'정상 가족' 가치관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았다.”

정관수술을 받은 사연으로 웃음을 줬던 개그맨 김대희씨의 방송 한 장면.
정관수술을 받은 사연으로 웃음을 줬던 개그맨 김대희씨의 방송 한 장면. ⓒ한겨레

#1.
활동가 최황(34)씨는 지난해 봄 정관수술을 받기 위해 비뇨기과 의원을 찾았다가 거절당했다, 의사는 “미혼·무자녀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생명 윤리적 측면도 있다”고 답했다. 정관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최씨는 다른 병원을 찾았으나 의사에게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 최씨는 결국 세 번째 병원에서 “결혼했고, 쌍둥이 자녀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에야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었다. 자녀 때문이 아니라 의료상의 이유로 거부한 것은 아니겠느냐는 <한겨레>의 질문에 최씨는 “정관수술을 받을 경우 전립선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는 마지막에 거짓말하고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만 들었다”고 답했다.

#2.
ㄱ씨는 올해 초 정관수술을 받기 위해 반차를 냈다. 음낭을 절개하지 않고 특수한 기계로 구멍을 뚫어 정관만 차단한다는 ‘무도 정관수술’을 받기로 했다. 이 수술법을 시행하는 의원들은 누리집에 수술은 10분에서 20분밖에 걸리지 않고, 곧바로 사무 업무에 복귀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홍보한다.그러나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병원을 찾았던 ㄱ씨 역시 병원으로부터 수술을 거절당했다. “자녀가 없는 분께는 이 시술을 안 해드린다. 제 소신이다”라는 의사에게 “만 37살인데, 이 나이먹은 성인이 자기 신체에 대해서 결정을 못 합니까?”라고 맞섰다. 의사는 “저도 성인입니다. 해주는 병원도 있겠지만, 저는 안 합니다”라고 답했다.

 

정관수술을 받기 위해 비뇨기과 병원을 떠도는 청년들이 있다. 정관수술은 정자가 이동하는 통로인 정관을 차단하는 수술이다. 정자는 고환에서 생성되어 부고환을 거쳐 정관을 통해 정낭으로 이동하는데, 이 통로인 정관을 차단한 남성은 정자 없는 정액을 사정한다.

정관수술의 피임 효과는 반영구적이며, 가장 확실하고 경제적인 피임법 중 하나로 꼽힌다.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기혼 남성들에게 배우자가 피임을 위해 권장하는 수술 가운데 하나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30만원 가량을 내야 한다. 그런데도 미혼의 무자녀 남성들은 이 수술을 받기 위해 비뇨기과 병원을 떠돌아야 한다.

최황 씨는 이 일련의 이야기를 지난 6일 <오마이뉴스>〈허프포스트〉를 통해 공개했다.

최씨는 이 글에서 “내 몸에 대한 나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당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불쾌했다”며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의 고환을 관리하는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고백했다.

독자 중에는 최씨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가 많았다. 이야기를 읽은 한 남성은 “진짜로 미혼이고 자녀가 없으면 수술을 안 해준다는 답을 들었다”며 <오마이뉴스>의 ‘원고료주기’ 시스템을 통해 최씨에게 돈을 보냈다.

 

■6개 비뇨기과에 정관수술 여부 문의해보니

실제로 <한겨레>는 신문사가 위치한 서울 마포구 공덕동 지역 근방 1㎞ 안팎에 위치한 6개 비뇨기과 의원에 정관수술에 대해 문의한 결과 “아이가 없으면 시술해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최씨에게 정관수술 해주기를 거부한 한 의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관수술 뒤 마음이 바뀌어 아이를 낳으려고 복원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성공 확률이 90%다. 10%는 복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케이스는 후회하기도 하고 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경우 부모가 병원으로 찾아오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의사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마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이렇게 하는 게 의료인으로서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한 병원의 관계자로부터는 “정말 원하면 시 외곽에는 해주는 병원도 있는 거로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수도권 외곽에 있는 한 비뇨기과에 전화해 확인한 결과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원장님이랑 상담을 잘해서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의료인들의 태도에서 수술을 받고자 했던 의료 소비자들은 미묘한 뉘앙스를 느꼈다고 말한다.

최씨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가치관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최씨의 경우 정관수술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최씨는 <오마이뉴스>에 쓴 글에서 “낙태 비범죄화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ㄱ씨는 정관수술을 거절당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정관수술을 하려는 너보다 정관수술을 해주지 않는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분위기가 풍겨 기분이 무척 나빴다”며 “가족 가치관을 설파하진 않았지만, 그 태도의 기저에 깔렸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정관수술 거부 법적으로 문제삼긴 어려워

법적으로 정관수술을 거부하는 의사의 행위를 문제 삼기는 힘들다.

의료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법무법인 고도의 김정민 의료팀 팀장은 “의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료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진료거부 금지의 위반 사례가 되기는 어렵다. 진료거부 금지의 목적은 생명이 위중한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의료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 혹시 입건 처리가 된다고 해도 위법성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김정민 팀장은 특히 “해당 수술을 받은 남성이 나중에 정관을 복원하더라도 정관의 차단 기간에 따라 임신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부분이 의료과실로 여겨질 수 있어 꺼리는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

과거 한국 정부는 출산 정책에 따라 정관수술에 대한 태도를 달리했다.

<한겨레>의 보도를 보면, 정부는 1960년대에는 ‘가족계획 사업’의 하나로 정관수술비를 지원했고, 1970년대에는 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권까지 줬다. 1977년 12월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공아파트 및 주택부금아파트 분양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발표했으며 1982년에는 예비군훈련 중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훈련 잔여 시간을 면제해줬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의 경우 정관수술자가 청약우선권을 갖게 되면서 ‘고자 아파트’, ‘내시 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최고치를 찍은 1984년에는 한 해에 8만3527명이 정관을 차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대한비뇨기과학회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설명을 보면, 비급여 수술인 정관수술은 국가 기관에 신고할 의무가 없어 한 해에 몇 명이 이 수술을 받는지 파악할 방법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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