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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잘 몰랐겠지만 ‘미투’는 언제나 존재했다

"피해자는 이렇게나 많은데 가해자는 다 어디에 있을까"

  • 이은솔
  • 입력 2018.02.07 11:17
  • 수정 2018.02.07 11:18
ⓒhuffpost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미투’는 3년 전이다. 페이스북 그룹으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단체 메시지를 나누던 중 어떤 이가 어릴 적 자신이 겪은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울먹이며 지하철을 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듯했다. 오래 잊고 있었던, 내가 중학생 때 겪은 성폭력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서없이 채팅창에 내 경험을 풀어놓고 지하철에 앉아 펑펑 울었다.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다. 울면서 확인한 채팅창에는 ‘나도 그랬다’는 말이 이어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피해자는 이렇게나 많은데 가해자는 다 어디에 있을까.”

친구 하나는 내가 울분을 토하며 말한 이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겪은 성폭력에 대해 밝힐 때면 멈칫하게 된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매번 어렵다. 혹시라도 내가 쓴 글을 우리 엄마가 보면 마음이 아플 텐데,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부터, 나중에 내가 취업을 할 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나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로만 보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까지, 온갖 생각들이 밀려왔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걱정이 아니었으리라.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말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사람들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살아남는 것이 다행이 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트위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을 공론화하는 계정이 줄을 이었다. #참고문헌없음 해시태그를 붙이고 성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지지했다. 이름을 드러낼 수 없을 때는 대학교 대나무숲에 익명으로 글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직장인 익명 어플에 회사 내에서 겪은 일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변화를 불러왔다. 2015년 ‘워터파크 몰카 사건’ 당시, 카메라의 날짜 설정이 실제와 달라,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특정할 수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이때 영상에서 자신을 발견한 피해 여성이 워터파크를 방문한 날짜를 경찰에 제보했고, 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촬영을 지시한 사람은 법정 최고형인 7년을 구형받았고, ‘몰카’는 대통령이 나서서 근절을 약속하는 심각한 범죄가 되었다.

단톡방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사생활의 영역이라며 문제조차 되지 않았던 사이버 성폭력은 이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서특필된다. ‘치기 어린 실수인데 한 번쯤 봐줄 수 있지 않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고 사건을 공론화한 피해자들의 용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들의 ‘말’을 통해, 그동안 사소하게 여겨지던 각각의 사건들은, ‘성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michaklootwijk via Getty Images

이것은 여성들이 쌓아온 ‘말하기’의 역사이고, 동시에 싸움의 역사다. 피해자가 입을 여는 순간 곧 비난과 배제를 감수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해자와 싸운다고 말한다. 나의 문제가 나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곧 다른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미투 운동 같은 게 없었죠?’라는 한 남성 시사평론가의 말은, 그래서 건방지고 게으르다. 여성들은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기 때문에, 그 고통의 시간을 너무나 쉽게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손쉬움에 더욱 화가 난다. 그동안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없었다’, ‘미흡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폭력과 고통에 둔감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자신의 ‘뿌듯함’을 위해 여성들에게 연대하자는 남성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그 전에 당신이 사과해야 할 일은 정말 없었는가.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하겠다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이런 성폭력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몰랐는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희롱을 목격하고도 눈감지는 않았는지. 당신도 농담이랍시고 불쾌한 말들을 던진 적은 없는지. 진심으로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름은 달랐지만, ‘미투’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루에도 수백 기가바이트의 정보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세상이다. 그중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MeToo를 외치는 작은 고백들, 그 몇 글자에 담긴 무수한 시간과 고민의 흔적을 부디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용기를 냈으면 한다.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겠다고, 함께 하겠다고, 더 이상 성폭력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할 때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중복송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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