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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자기 혐오'가 '가해자를 향한 분노'로 바뀌고 있다

  • 양파
  • 입력 2018.02.05 12:14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가해자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

ⓒhuffpost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주 하는 말인데 몇몇사람들이 잘 이해 못하는 듯 하여.

당신이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고 하자. 검정고시 출신이든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든지, 아니면 어머니가 물장사를 하셨거나 아님 그냥 단순하게 가난하거나. 어쩌면 지방대학 출신인 걸 숨기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혼 경력. 이번 시나리오의 배경은 고등학교라 치고 당신은 좀 못 사는 집의 아이라고 하자. 잘 살고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당신을 공공연하게 놀렸다. ”우와 얘 임대아파트에 살아서 냄새 나!” 그런데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당신이 사는 아파트 옆에는 시궁창 냄새가 지독하다. 당신은 반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손가락질 해대거나 킁킁거릴 때 엄청난 모멸감에 피해다니기만 했다.

설령 정말 냄새가 났다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니다. 아파트 옆에 하수구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은, 집의 사정으로 빨래를 자주 돌리지 못한 것도 당신 잘못은 아니다. 놀리는 놈이 X새끼다. 그러나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머리로는 이해해도, 철저하게 무시당한 고등학생은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가난이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정말 냄새날까 무섭기 때문에, 당신은 교장선생님에게 달려가서 ”애들이 저보고 가난하고 냄새난다고 놀려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게 내 잘못이 아니고, 그 새끼가 나쁜 놈임을 인정할 수 있는 시기는, 가난이 부끄러움을 아님을 받아들인 후에야 온다. 그건 20대일수도 있고 30대일수도 있고, 평생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뉴스1

당신은 이름없는 대학에 다니다가 유명 대학 분교로 편입을 했다. 분교 출신인 것은 죽도록 숨기고 싶다. 그런데 첫 직장에서 서울대 출신 선배가 술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콱 찍어 말한다. 야, 너 편입을 해도 분교로 들어갔다면서? 고등학교때 공부좀 하지 그랬냐. 그리고 거의가 스카이 출신인 좌중들이 다 웃었다. 당신은 그 이후로 학력세탁범 취급을 받았다.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학벌사회 내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비웃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엄청난 수치심에 휘청거리느라, 스카이에 못간 자신을 혐오하느라, 이 사건의 본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공개적으로 지적한 새끼가 X새끼다. 이건 따져야 한다. 당신은 학벌놀이의 피해자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려면 이렇게 말 해야 한다. ”서울대 나온 상사가 저보고 분교로 편입한 주제에 스카이 출신인척 한다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잖아? 분교 출신인 거 숨기고 싶어했잖아? 그냥 넘어가면 술자리에서의 얘기로 끝날지 모르지만, 내가 나서서 공론화 하면 불특정 다수에게 방송을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게 언제 가능하냐면, 불특정 다수에게 내가 분교 출신임을 아무렇지 않게 말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학벌주의의 시선에서 벗어나서야 가능하다. 내 잘못이 아니고, 학벌주의의 텃세 피해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서 힘들다.

성폭력 피해자를 보자. 어떻게든 성적인 뉘앙스에 엮인 여자는 더러워진 상품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쭉 자랐다. 더러워진 상품은 남자들이 더 만만하게 보고 막 대한다. 한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번 당했다면 오히려 더 나쁜 놈들이 덤빈다. 성폭력 당했다고 떠들어서 나에게 도움 될 것 하나도 없다. 주위 사람들은 네가 좀 조심하지 그랬냐고 탓할 터이다. 그런 그녀가 ‘나는 성폭력의 피해자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성폭력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았음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놓고 말 해도 주위 사람들이 받아줄 확신이 있고 그것은 절대로 내 잘못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는 데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대한민국에서는 2018년이 되어서야, 무려 검사 정도 되어야 방송에 나와서 말 할 수 있을 정도니까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단군 이래 그런 분위기 따위 없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잘못이라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말 못한 여성들이 백퍼다.

내 잘못이 아니다. 가해한 놈이 X새끼다. 나는 떳떳하게 가해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말을 할 것이고,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은 나의 가치를 더럽히지 않는다. 이 간단한 이치를 아직도 대한민국은, 이 세상은,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다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드디어 자기 혐오에서 가해자를 향한 분노로 바뀌고 있다. 말했듯이 단군이래 최초다.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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