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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14일 10시 06분 KST

드라마 주인공: 정신질환을 앓다

SBS

'괜찮아…' '나쁜 녀석들' '킬미 힐미'등…"내적갈등에 대한 논의 필요한 시점"

우울증·공황장애·사이코패스…갈수록 다양해지는 주인공 정신질환

우울증, 공황장애, 자폐증은 그나마 약과다. 조현병(정신분열), 다중인격, 사이코패스까지 등장한다.

TV 드라마 주인공의 영역 파괴가 이뤄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기시 됐던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이 버젓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설정되고 있다. 조연이나 악당 캐릭터가 아니라 당당히 주인공 역할이다.

처음에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고 일반인에게도 비교적 '친숙한' 병을 앓고 있더니, 자폐증과 분노조절장애, 투렛증후군(틱장애), 강박증 등을 거쳐 이제는 강도가 최고 등급인 조현병과 다중인격에까지 이르렀다.

극성을 강화하기 위해 동원됐던 암은 이제 너무 많이 써먹어서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할 정도다. 그러다보니 드라마 제작진들이 몸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 정신의 병으로 주인공의 '스펙'을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이 많고,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진 점도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흐름 속에서 과거에는 영화에서만 볼 수 있거나, 드라마에서도 연쇄살인마나 절대 악을 그릴 때만 내세웠던 조현병이나 사이코패스마저 순화되고 색다른 포장을 거쳐 드라마 주인공에게 입혀진다.

방송가 안팎에서는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라고 보는 시선과 "병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계하는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KBS 드라마국 정해룡 CP는 "외적 갈등이 개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인간 내면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할 수도 있고 문화적으로 성숙해진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자폐증 앓는 천재 외과의·공황장애 앓는 재벌 3세

2011년 SBS '보스를 지켜라'의 주인공 차지헌은 공황장애를 앓는 재벌 3세였다.

지성이 연기한 이 역할은 '초딩'이라는 별명답게 유치하고 철없으며 막무가내다. 하지만 사실은 아픈 과거 탓에 공황장애를 앓고 있고 결벽증도 있는 인물이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던 까닭에 기본적으로는 코믹한 분위기로 갔지만 지성은 중간중간 가슴을 부여잡으며 공황장애로 고통받는 연기를 펼쳤다.

작년에는 자폐증을 앓는 천재 외과의의 이야기를 그린 KBS2 '굿닥터'가 방송됐다.

주원이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을 지닌 자폐성향의 발달장애 청년 박시온을 연기했다. 드라마는 박시온이 세상의 모진 시선을 극복하고 소아외과 전문의로 성장하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정해룡 CP는 "외적 갈등에 비해 내적 갈등은 드라마에서 그리는 데 재미가 없는 소재다. 다수 대중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도 그런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최근 마음이 아픈 주인공들이 잇달아 선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발전했지만 스트레스가 인간 내면에 쌓이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조현병 앓는 완벽한 외모의 인기 소설가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이 TV 토크쇼 등에서 연예인들의 경험담을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병이라면, 조현병은 일반인들이 평소 접하기 힘든 병이다.

지난 11일 막을 내린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남자 주인공 장재열은 조현병을 앓는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환시를 보고, 잠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구긴 채로만 잘 수 있다. 자해도 일삼는다. 상태가 굉장히 심각하다.

그런 장재열을 날이 갈수록 '미모'가 익어가는 조인성이 연기했다. 장재열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인기 라디오 DJ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장재열이 결국 사랑의 힘으로 병을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는 해피엔딩을 보여줬다.

앞서 용인정신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선철 진료과장은 이 드라마에 대해 "정신과의 문턱을 낮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질병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아동기 외상이 조현병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어설프고, 자칫 그게 인과관계로 도출될 위험성이 있다"며 "특히 환시 등 장재열이 겪는 상황이 매력적으로만 보이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 사이코패스·다중인격장애·소시오패스

내달 4일 시작하는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의 주인공은 천재 사이코패스 이정문이다.

한류스타 박해진이 연기하는 이정문은 IQ 160으로, 최연소 철학·수학 박사 타이틀을 가진 천재다.

제작진은 "맑고 순수한 얼굴 뒤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숨긴 이정문은 최연소 연쇄 살인범이다"라고 설명했다.

'나쁜 녀석들'은 각종 강력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모아 더 나쁜 악을 소탕하려는 강력계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11부작 드라마로, '더 나쁜 악'을 연기하는 박해진의 사이코패스 연기가 드라마를 이끌게 된다.

앞서 중국에 한류 붐을 다시 지핀 '별에서 온 그대'에는 소시오패스가 조연으로 출연했다. 신성록이 연기한 재벌 2세 이재경이다.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이 없는, 전형적인 악마 캐릭터다.

이처럼 '별그대'를 포함해 이전까지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위험한 캐릭터가 드라마에서는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렀다면, '나쁜 녀석들'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박해진에게 사이코패스라는 옷을 입혀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독특하다.

내년 1월 MBC TV를 통해 방송될 예정인 '킬미, 힐미'의 주인공은 다중인격장애를 앓는다. 무려 7개의 인격을 가진 재벌 3세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다. 정신병을 앓는 재벌 3세가 범죄를 저지르는 스릴러가 아니라, 그 재벌 3세와 그의 비밀 주치의가 된 레지던트 1년차 여의사의 로맨스를 코믹하게 그린다. 현재 캐스팅이 진행 중이다.

◇ "새로운 소재의 발굴" vs. "병을 왜곡할 위험"

아직 방송되지 않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정신병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물음표로 남아있는 가운데, 이미 방송된 작품들은 '사랑'을 해결책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공통분모다. 아무리 심각한 정신질환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SBS 드라마국 김영섭 국장은 '괜찮아 사랑이야'의 주인공이 조현병을 앓는 설정에 대해 "정신분열이라는 설정이 사실 부담스럽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극복방법을 제시한다면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국장은 "무엇보다 작가와 연출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또 실제로 잘 소화해냈다고 본다"면서 "많은 현대인들이 우울증, 강박증, 편집증, 성도착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질환을 숨길 것이 아니라 밖으로 끄집어 내어 왜곡된 인식을 개선하고 치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자는 의도가 의미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서도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까.

용인정신병원 박선철 과장은 "조현병 환자는 장기 치료가 요구되는데 입원을 반복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부모님 말고는 곁에 아무도 안 남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박 과장은 "조현병을 오래 앓게 되면 제일 먼저 형제가 떠나고 그 다음에 배우자가 떠난다. 물론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장재열처럼 치료가 잘 되겠지만 완치라는 것은 없다. 환자는 늙어가고 50세쯤 되면 곁에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안 남는다"면서 "무엇보다 그 과정이 투쟁과 같다. 치료하는 과정에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드라마는 그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조현병을 다룬다"고 지적했다.

한 제작사 대표는 "자칫 왜곡된 정보나 환상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에 몸의 병이든 정신의 병이든 기본적으로 사실에 기반해 다루는 게 중요한 것 같다"며 "드라마에서 질병은 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설정이자 주요 소재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질병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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