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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22일 06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0월 22일 14시 12분 KST

불운의 명작을 찾아서 (2) | 만화 '불의 검'

만화 '불의 검'은 비운의 명작이다. 무려 12년간 연재처를 3번이나 바꾸며 이야기를 완결했다. 1992년 <댕기>에서 시작해서, 2000년부터 <화이트>를 거쳐, 2004년 웹진 <위식스>에서 12권으로 완결되었다. 작품의 줄거리보다 더 드라마틱한 역사다.

세상엔 참으로 멋진 사람들이 살고 있노라고 노래꾼 바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가 없어도 그를 위하여 그 불칼의 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내 님을 지키는 그 칼을 만들어 험한 전쟁터를 넘어 그를 만나야 했다. 불칼의 노래, 만화 '불의 검' 중에서.

김혜린이라는 만화가가 있다. 이름보다 작품으로 더 알려진 작가. 비천무, 북해의 별 그리고 불의 검.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다룬 대서사시, 대장군 '아사'와 비련의 여인 '아라'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문명으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대상.

0. 불운의 시작은 폐간.

만화 '불의 검'은 비운의 명작이다. 무려 12년간 연재처를 3번이나 바꾸며 이야기를 완결했다. 1992년 <댕기>에서 시작해서, 2000년부터 <화이트>를 거쳐, 2004년 웹진 <위식스>에서 12권으로 완결되었다. 작품의 줄거리보다 더 드라마틱한 역사다.

1. 가슴 먹먹한 명대사.

불의 검 애독자라면 누구나 가슴 시린 대사들을 잊지 못한다. 국어교육과를 나온 작가의 필력은 소설 그 이상이다. 지고지순 사랑 일색의 순정만화에 상고시대의 대서사를 담은 의도부터가 압권이다. 그 노랫말보다 아름다운 명대사를 잠시 들어보자.

사람 잡는 무기라 소름 돋는 일이어도, 내 님 피일랑 아끼고 우리 봄 활짝 피게 도움 닿는 일이라면 나는 누가 뭐라 건... 얼마든지 불과 벗해 불과 싸워 나갈 수 있어. by 아라

친구로서 날 패고, 왕으로서 내게 명령해라. 나는 네가 벌여온 판에서 안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대마. 대마의 꿈은 왕의 꿈과 거의 같고 준비가 끝났다. by 가라한

기분 좋은 이 혼곤함. 그대는 나의 칼집이다. 우리가 견뎌온 세월 중에 그대가 벼려낸 가장 큰 칼은 나다. 사랑한다. 고맙다. 그리고 또 사랑한다. by 아사

하늘에 빌려 산 목숨, 이제 돌려줘야지. 눈 앞이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안보이니 그게 좀 섭섭하긴 하네.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얼마나 이쁜 곳인지 모른다고. by 바리

2. 철의 여인, 아라.

작가 김혜린은 여성이라는 존재의 강인함을 작품의 한 중앙에 배치했다. 대부분의 순정만화가 남성성에 반대되는 여성을 등장시켜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반면, 김혜린은 당당한 주체로 사는 독립적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특히 불의 검의 아라가 그렇다.

3. 시대를 앞선 설정들.

불의 검은 1990년대 순정만화에서 보기 힘든 설정들이 등장한다. 특히 여주인공이 강간을 당하고 증오하는 상대의 아이까지 낳아 기른다는 설정과 대장군이었던 남주인공이 전투 중에 기억상실에 걸렸다가 사랑의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 등이 그렇다. 한국 드라마보다도 앞섰다.

4. 외우기 힘든 캐릭터.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한다고 명작은 아니지만, 명작에는 다채로운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특히 불의 검에는 수많은 인종, 종족, 계급, 직업이 등장한다. 작가는 작명에 순한글과 고어를 사용하는 등 깊이를 더했다. 이름 외우기가 겁나게 어렵다.

5. 붉은 꽃, 바리.

불의 검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주인공 아라와 아사보다 붉은 꽃 '바리'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남성이자 여성이며, 노래꾼이자 세작(細作)이다. 연인관계인 아라와 아사 사이에서 썸(?)을 타는 독특한 인물이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6. 뮤지컬 불의 검.

2005년 가을. 국립극장에 불의 검의 장엄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뮤지컬 '불의 검'이었다. 브로드웨이의 흑진주 이소정과 크로스오버테너 임태경이 주연을 맡았다. 나는 운 좋게 이 작품에 주관사 대표로 참여해서 김혜린 선생과 직접 작업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만화 '불의 검'은 2005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장편/연재만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12년의 인고 끝에 세상의 인정을 받는 값진 순간이었다. 2005년 가을 장충동 어느 선술집에서 공연을 마치고 김혜린 선생과 소주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취기가 돌고 깊은 이야기를 나눈 후, 선생님의 귀가길까지 동행했던 그 시간이 그립다. 실카강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