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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08일 12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0월 10일 14시 12분 KST

논리가 배제되는 '감정의 왕국'

윤리학자는 사고 실험을 자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병원에 말기 환자가 4명 있다고 하자. 필요한 장기가 각자 다른데 기증자는 없다. 그런데 병원에 있는 건강한 남자 한 명을 죽이면 말기 환자들 모두가 필요한 장기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남자를 죽여서 그 사람의 장기를 이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모두 아니라고 대답한다. 말기 환자들이 다름 아닌 베토벤, 셰익스피어, 아인슈타인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라면? 이럴 경우 집도 친구도 없는 부랑자를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난 비종교인이자 이성주의자로서 이런 질문을 논리와 이성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요즘 사회 일부에서 이성은 개입할 수 없고 감정이 '왕'인 터부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이런 자세는 이미 종교 추종자들에게서 충분히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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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터부시되고 이성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감정의 왕국'이 존재할까?

윤리학자는 사고 실험을 자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병원에 말기 환자가 4명 있다고 하자. 필요한 장기가 각자 다른데 기증자는 없다. 그런데 병원에 있는 건강한 남자 한 명을 죽이면 말기 환자들 모두가 필요한 장기를 얻을 수 있다. 한 명의 희생으로 네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남자를 죽여서 그 사람의 장기를 이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모두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윤리학자는 한 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묻는다. 칸트의 원칙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칸트의 원칙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예외란 없는 것일까? 예외를 고민하게 하는 가상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즉, 말기 환자들이 다름 아닌 베토벤, 셰익스피어, 아인슈타인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라면? 이럴 경우 집도 친구도 없는 부랑자를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폭발로 탄광에 광부 두 명이 갇혔다. 살릴 수 있지만 비용이 적어도 백만 달러가 예상된다. 백만 달러면 굶주려 죽는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는 돈이다. 그 수천 명을 살리기 위해 광부들을 포기하는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을까? 대부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가? 아니면 이런 질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나?

이런 딜레마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사안을 직시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게 윤리학자의 임무이다. 윤리학자인 친구에게 이메일을 받았는데 두 광부에 대한 가상 질문을 한 후 비난과 항의 편지가 쏟아졌다고 한다. 또 사고 실험에 따라 학생들의 의견이 나뉜다는 것이다. 일부 학생은 실험의 전제가 되는 상황이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받아들이고 토론을 하는 반면 다른 학생들은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런 가정 자체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귀를 막고 대화 참여를 거부한다.

"유전적으로 특정 인종이 지적으로 더 우수할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걸 다 잊고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잠깐 고민해보자. 그런 상황에서는 고용차별이 문제가 될까? 등등." 내 친구는 이 문제도 강의에 자주 이용하는데 학생의 절반 정도는 이런 가상 조건을 전제로 논리적인 토론을 벌이는 데 문제가 없지만, 나머지 반은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토론에 참여하기를 아예 포기한다고 한다.

우생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고문은 어떻고? 엄청나게 큰 핵폭탄의 시한장치가 가방 안에 들어있다. 그 가방이 있는 장소와 시한장치를 푸는 방법을 아는 첩자가 검거됐다. 그런데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그를, 아니 아무 죄 없는 그의 아이들까지도 고문하는 게 윤리적으로 용납되는가? 그 폭탄이 지구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라면?

이런 달갑지 않은 가상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감정적인 반감 때문에 그런 대화 근처에도 못 가는 사람이 있다. 또 이런 사람 중 일부는 그런 종류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 차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더 나가서는 자신들이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사고 실험을 진행한 윤리학자를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여자는 자기 몸에 대한 완전한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몸 안에 있는 태아를 포함한다. 태아에게 시를 읊을 만한 의식이 있다고 해도 여자 몸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낙태를 하든 말든 그녀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자궁 안의 시인'에 관해 논리적으로 토론할 것인가 아니면 감정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도 대화는 진행될 수 없는 것인가? 여성의 권리는 절대, 절대, 절대적이라고 하며 대화를 끝낼 것인가? 아니면 낙태는 악, 악, 악이며 살인이라고 하며 더 이상의 대화는 중단할 것인가?

"식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일부러 죽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왜 꼭 나쁜지 토론해 볼 수 있을까? 사고로 죽어 길에 있는 인육은 왜 안 먹을까? 물론 죽은 이를 아는 사람 입장에선 매우 끔찍하겠지만 만약에 친척도 친구도 없다고 가정하면 왜 그를 먹지 말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게 파멸의 길이라도 되는 것일까?" 윤리학 교수와 이런 문제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토론할 것인가 아니면 격한 감정에 울화통을 터뜨리며 강의실을 뛰쳐나갈 것인가?

난 비종교인이자 이성주의자로서 이런 질문을 논리와 이성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불편한 가상 질문에 강제로 사고하게 하는 것도 안되지만 반대로 그런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을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옳지 않다. 나는 요즘 사회 일부에서 이성은 개입할 수 없고 감정이 '왕'인 터부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이성이 두려움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영역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자세는 이미 종교 추종자들에게서 충분히 보아왔다. 종교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감정의 터부 영역'에 현혹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럼 이제 가설에서 현실로 옮겨보자. 여성 생식기 절제(female genital mutilation, FGM, 할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절반 정도의 사람은 "그럼 남성 포경수술(할례)은 어떻고?"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여성 할례 반대 운동에 제동을 걸고 훼방을 놓으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일쑤다. 만약에 "어린 남자아이에게 할례를 시키는 것도 나쁘지만 여성 할례는 훨씬 더 나쁘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대화가 중단된다. 왜냐하면 둘 다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에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고통에 감히 등수를 매기려고 할까?

연예계의 어느 유명인사가 소아성애(페도필리아)로 처벌을 받았다고 하자. 이럴 경우 "성기로 삽입한 건가? 아니면 손으로만 만졌나? 손으로 만진 것은 나쁜 행위지만 삽입은 훨씬 나쁘다." 식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감히 소아성애 범죄에 등수를 매기려고 할까? 당신 뭐야? 숨어 사는 소아성애 가해자 아냐?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우 난해하고 끔찍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대화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많이 보게 된다. 친구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 국가 설립은 우리에게 필수였어. 왜냐하면 홀로코스트 이후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우리는 너무 오래 짓밟혀왔어. 그래서 앞으로 우리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거야." 그러면 나는 가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그건 이해해. 하지만 내 질문은 히틀러의 범죄 때문에 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당해야 하느냐는 거야. 왜 팔레스타인이냐고? 바이에른이나 마다가스카르를 겨냥하지 않고 그 조그만 지역을 공격하는 이유로 무슨 성서적인 핑계를 대지는 않겠지?" 그러자 아주 진지하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리처드, 이 대화는 여기서 마치는 것이 좋겠어." 또 하나의 터부 지역에 내가 실수로 발을 디딘 것이었다. 즉 토론이 금지된 신성한 감정의 영역 말이다. 홀로코스트로 인한 극단적인 감정적 번뇌 때문에 그런 질문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 사이라도 그런 영역에 대한 대화를 나누느니 아예 중단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번 이스라엘·가자 사태에 관한 이런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가자가 입고 있는 파괴범위는 가당찮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집, 가족, 모든 걸 잃었다."

이 글을 올리자마자 친 이스라엘 친구들은 날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래서 샘 해리스의 "하마스는 모든 유대인을 죽이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는 말을 인용하며 그의 가상 질문을 던져 봤다. 만약 처지가 바뀌어서 하마스가 이스라엘만큼의 무력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이스라엘의 폭격은 사실 상당히 절제 있는 행동이라는 얘기인데, 이번에는 샘과 내가 가자의 어린 아이를 겨냥한 폭격을 두둔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 샘의 "이스라엘이 유대 국가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자 친이스라엘 세력은 바로 샘과 나를 겨냥해 별의별 독설을 퍼부었다. 나는 크리스토퍼 히첸스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면서 내 입장을 설명했다. "과거 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개탄하는 동시에 지금 그 국가를 파괴하려는 것을 개탄하는 자세는 매우 논리적이다." 이 말을 한 직후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은 문제의 양면을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내 교훈이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트위터 논란으로 증명됐다.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나쁘다. 믿었던 친구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 문장을 읽고 내가 낯선 사람의 강간을 옹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디 가서 제대로 사고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나는 가상의 상황을 얘기한 것이다. 즉 믿는 사람이자 친구에게 그런 참사를 당한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당했을 때보다 더 배신감과 분노가 큰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추론이다. 예전엔 반대의 가상 질문으로 똑같은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데이트 상대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나쁘다. 칼을 겨눈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 문장을 읽고 내가 데이트 강간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디 가서 사고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상반되는 이 두 가정은 아래 트위터에 올렸듯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X는 나쁘다. Y는 더 나쁘다. 그렇다고 내가 X를 권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간단한 논리적 차원의 문제였다. 어떤 것을 나쁘게 여기고 다른 것을 더 나쁘게 여긴다고 둘 중 덜 한 악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둘 다 나쁘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이 덜 나쁘다는 표현을 한다고 해서 덜 나쁜 쪽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폭행에 대한 가상 문장이 논리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 못 하고 화내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내가 어느 종류의 강간이 더 극악무도한지를 정의하려고 하는 걸로 착각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면을 이해하는 일부조차도 나를 심하게 다그쳤다. 왜 감정적으로 예민한 강간을 예를 들었느냐는 것이다. 한 무신론자 블로거가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했어도 되었잖아. '누구의 뺨을 때리는 것은 나쁘다. 코를 부러뜨리는 것은 더 나쁘다.' 왜 하필이면 강간이야?"

맞다. 코를 예로 들 수도 있었다. 내가 왜 강간을 선택했는지 설명하겠다. 절대 피해자의 경험을 비하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입힐 의도는 아니었다. 피해자들은 이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충분히 상처를 받고 있다. "그 여자는 매우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나 좀 잡아먹으세요'가 아니면 뭐야. 하하하"라는 말을 일삼는 부류 말이다. 그럼 왜 내가 코를 부러뜨리는 예가 아닌 매우 불편한 강간을 주제로 선택했는지 이야기하겠다.

우선 나와 같은 이성주의자는 감정의 틀에서 벗어나 윤리적인 가상상황 설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충분히 설명됐기를 바란다. 식인, 어둠에 갇힌 광부, 장기 기증, 낙태, 할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은 모두 논리가 발을 디딜 수 없는 감정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코 부러뜨리기'는 그런 영역이 아니다. 그렇지만 강간은 그 안에 존재하고 소아성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사고와 토론의 장에서 배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난 사실 위의 주제가 얼마나 터부시되는지 몰랐다. 물론 지금은 아주 잘 안다. 난 진심으로 논리와 이성에 대한 열정이 높다. 식인이나 광산에 갇힌 광부 같은 주제에서도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배척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간과 소아성애도 논리와 이성이 개입할 수 없는 터부의 영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뇌했다.

"강간은 강간이야." 어떤 종류의 (말하자면 친구에 의한) 강간이 다른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에 인한) 강간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강간은 강간이기 때문에 어떤 강간이 더 나쁘고 덜 나쁜가에 대한 생각 조차가 부적합해. 이런 끔찍한 대화는 듣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데이트 강간이든 아니든 강간을 무슨 순위를 매긴다는 자체가 부당하고, 치욕적이고 말도 안 되며 그건 터부라고. 강간이라는 범죄에 차이를 둔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짓이야.

만약에 이 말대로라면 판사가 강간사건을 판결할 때 어떻게 강간이 이루어졌는지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모든 가해자에게 같은 처벌(예를 들어 종신형)을 내리자는 건가? 여자를 술에 취하게 해서 겁탈한 가해자이건, 어두운 골목에서 칼을 들이대고 여자를 강간한 정체 불명한 가해자이건? 판사가 형을 결정할 때 다양한 상황을 무시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가? 나는 반대다. 그리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요즘 트위터를 보면 그런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들은 내게 "죄에 정도란 없다. 정도를 논하는 것 가체가 당신이 사악한 괴물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했다.

나는 이성주의자와 회의론자 입장에서는 논리와 이성이 출입 불가능한 터부 영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상의 식인과 도로의 시체를 먹는 것에 대한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 (당연히 거부해야 하지만 적어도 토론은 하자는 것이다) 우생학도, 할례도 마찬가지다. 또 강간 관련해 나쁜, 매우 나쁜, 극심하게 나쁜 식으로 죄가 평가될 수 있는지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코를 부러뜨리거나 뺨따귀를 때리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코를 부러뜨리는 것으로는 논리를 펼 수 없었던 것은 "코를 부러뜨리는 것이 뺨따귀를 때리는 것보다 더 나쁜 행위"라는 발언을 듣고 내가 따귀를 권장한다고 착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Y가 X보다 더 나쁘다"의 예치곤 너무 사소하면서도 당연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간이나 소아성애의 경우 사람들이 그렇게 당연히 여기지 않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바로 그 주제를 선택한 것이었다. 데이트 강간이 음침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보다 더 나쁘든 그 반대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또 소아성애와 마찬가지로 강간이 예민한 주제라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난 예민한 주제에 대한 토론을 터부시하는 사회 현상에 맞서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가상 문제로 소아성애와 강간을 택했다. 이성주의자는 아무리 혐오스러운 주제이고 또 나중에 그 결과를 거부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강간과 소아성애가 이런 자유토론의 범위에서 점점 더 멀어져 터부시되고 있다는 것을 난 알아차렸다. 나는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 모든 터부에 맞서는 차원에서 금기에 도전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토론의 장에서는 금지돼선 안 된다. 아니, 조금 고쳐 말해보자. 만약에 어떤 주제가 대화 주제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함께 앉아서 바로 그 얘기부터 해보자. 감성이 왕인 지역을 침범했다고 무조건 토론을 묵살하고 그들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강간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로 위협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또 개탄스러운 사실은 무신론자 커뮤니티 내에서조차 내가 이 글에 쓴 가상 질문 같은 것이 용납되지 않는 생각과 말의 규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 농담이 아니다 - 마녀사냥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조지 오웰의 '사상경찰'에게 신성모독자로 몰려 사냥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K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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