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4년 08월 04일 13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0월 04일 14시 12분 KST

알몸연습 예찬

날이 정말 무더웠다. 선풍기 바람으로 성이 안 차 피아노 옆에 옷을 훌렁 벗어 놓았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가느다란 길이 이제야 고스란히 느껴졌다. 실오라기를 걸쳤을 때는 차마 알지 못했던 낱낱의 감각이 기억의 해동과 함께 깨어나던 놀라운 순간이었다. 팬티 고무줄이란 결국 관념의 굴레와도 같은지 몰랐다. 몸 대 몸으로 정직하게 악기와 대면할 수 있다면, 더불어 내 위선의 더께도 벗어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두 달 반 동안 냉동실에 묵혔던 곡들을 다시 꺼내 연습하는 중이다. 기억뿐만 아니라 감각의 해동이어서 반갑다가도 예전만 못한 부분에서는 조바심이 난다. 무대에 올렸던 곡들이니 빠삭하게 알고 있다 자신했지만, 공백기 동안 그도 나도 새롭게 변했다. '그땐 어떻게 이렇게 쳤었지?' 악보에 표기된 손가락 번호를 일일이 고쳐 적고, 악상의 맥락을 지난번과는 달리 완전히 뒤집어 보기도 한다. 지긋지긋하게 푸닥거렸던 곡인데도 낯설고 싱싱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꼭 그렇지 않던가. 휴지기를 겪고 나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한 숱한 시행착오들조차 다시 신선한 힘을 얻기 마련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 늘 시도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날이 정말 무더웠다. 선풍기 바람으로 성이 안 차 피아노 옆에 옷을 훌렁 벗어 놓았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가느다란 길이 이제야 고스란히 느껴졌다. 건반을 향해 뻗은 위팔에 종종 유두가 스쳤다. 수줍고도 감미로운 감촉이었다. 척추와 유두의 감각이 깨어나자 내친김에 하의까지 다 벗어 내렸다. 이제는 배꼽과 체모가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강력한 포르티시모를 연주할 때마다 배꼽 아래 불끈 힘이 일어나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체모는 속박이 풀린 듯 선풍기 바람에 하늘거렸다. 실오라기를 걸쳤을 때는 차마 알지 못했던 낱낱의 감각이 기억의 해동과 함께 깨어나던 놀라운 순간이었다. 팬티 고무줄이란 결국 관념의 굴레와도 같은지 몰랐다. 몸 대 몸으로 정직하게 악기와 대면할 수 있다면, 더불어 내 위선의 더께도 벗어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알몸연습에 이어 피아노 위에 똑같은 모양의 거울을 3개 나란히 올려놓았다. 거울가게를 몇 군데 발품 팔아 겨우 찾은 것들이라 날이 갈수록 애착이 생긴다. 대개의 탁상 거울은 동그란 모양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지만, 이 거울은 긴 직사각형에 90도로 완벽히 곧추 세울 수 있어 좋다. 저음역엔 왼쪽 거울, 중간 음역은 가운데 거울, 고음역은 오른쪽 거울, 연습하는 동안 3개의 거울을 넘나들며 내 얼굴을 응시할 수 있다.

애초엔 건반에 붙박혀 있는 인식과 시선을 끌어 올리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미친년 널뛰듯(이런!) 정신없는 도약을 만날 때마다 온 신경은 건반에 흡착되기 일쑤이다. 에너지를 뿜어내야 할 악절에선 틀린 음에 착지할 위험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까닭이다. 이 복잡하고 거대한 프레이즈를 헤쳐나가기 위해 몸과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운다. 이때 연주하고 있는 나를 거울에 비추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적나라하게 자각할 수 있다. 용기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한 발짝 물러나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않던가.

거울은 쇄골까지만 비춘다. 허나 거울 안의 눈빛, 표정, 턱선의 방향, 쇄골의 균형 등에서 내가 음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낱낱이 점검할 수 있다. 시선의 높이를 건반으로부터 해방시키면, 인식의 지평도 근경에서 원경으로 확장된다. 거울로부터 반사되는 눈빛을 마주하면 찰나에 탐닉하고 있는지 아님 전체적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선명히 변별할 수 있다. 가볍고 익살스런 악절에서 심각한 울상을 목도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땐 음악적 내용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표정들을 생략해 나가야 한다. 음악의 방향과 어긋나 있는 몸통의 기울기를 교정할 때마다 습관을 바로잡는 부모의 마음을 닮는다.

거울연습이 나르시시즘의 강화가 될까 우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허나 거울 속의 나는 또 다른 관찰자와도 같아서 오히려 객관화를 이끌기 마련이다. 사거리 한복판에 책상을 갖다 놓은 듯 독서했다는 어느 현인의 일화처럼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와 같은 기능으로 주관에 매몰되지 않도록 돕는다. 이처럼 거울 앞에서 알몸으로 연습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르시시즘의 장치로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호된 훈련과도 같았다. 정작 내 몸을 이렇게도 몰랐다니, 어느새 두껍게 굳어버린 페르소나의 가면을 홀가분히 벗어 던지고 싶다.

Félicien Rops [L'étude]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한국일보 : 토요 에세이 2014-08-02]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