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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14일 14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13일 14시 12분 KST

미완성의 혁명? | 프랑스대혁명 225주년

7월 14일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지 225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요사이 19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 된 프랑스조차도 알고 보면 대혁명 이후에도 숱한 굴곡을 겪어 지금에 이른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은 하되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너무 낙담하실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근현대사를 한 번 주마간산격이지만 살펴 보기로 하자.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7월 14일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지 225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요사이 19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자유•평등•박애의 기치를 들고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 된 프랑스조차도 알고 보면 대혁명 이후에도 숱한 굴곡을 겪어 지금에 이른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은 하되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너무 낙담하실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근현대사를 한 번 주마간산격이지만 살펴 보기로 하자.

(이 글은 원래 재작년 대통령 선거 직후에 많은 분들이 멘붕-_-;하신 상태에서 당시 관객들의 인기를 끌던 "영화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파리 콤뮨"이라고 하는 어느 '영화평론가' 분의 조금 어이 없는 영화평을 보고 열받아서(쿨럭;) 트위터에 정리해 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대하트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연작트윗을 내가 처음 쓰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도 해서 개인적으로는 손질해서 블로그를 시작하면 정리해 올리고 싶었던 글이기도 하다.)

프랑스 근현대사 정리 간략 연표: 부르봉왕조/프랑스대혁명(1789~1794)/총재정부(1794~1799)/통령정부(1799~1804)/제1제정(1804~1815)/(부르봉)왕정복고(1815~1830)/7월왕정(1830~1848)/제2공화정(1848~1852)/제2제정(1852~1871)/파리 콤뮨(1871)/제3공화정(1871~1940)/독일점령과 비시(괴뢰)정부(1940~1944)/제4공화정(1944~1958)/드골의 (사실상의) 쿠데타(1958)/제5공화정(1958~현재)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를 상당 부분 다룬 책들 중에서는 고(故) 노명식 교수님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 꼬뮌까지, 1789~1871]가 제일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프랑스근현대사를 보면 참으로 멘붕 겪었을 만한 것이 1789년에 대혁명이 일어나 봉건특권이 폐지되고 1792년 공화국이 되고 이듬해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앙트와네트의 목까지 쳤다가 혁명 후 26년 만에 다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복귀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프랑스대혁명이 성과도 많았지만 혁명이 과격화해 강 한가운데로 '반혁명분자'들을 배에 태워가 배에 구멍을 뚫어 '처리'(낭트의 익사형)하기도 하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당 집권기에 7주간 1300여명의 목을 단두대에서 자르기도 하였다-_-

프랑스공화파 중 혁명의 과격성에 진저리를 친 이들이 공포정치를 이끈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의 목을 베고 연 것이 테르미도르(열월)반동(1794)에 이은 총재정부이다. 그런데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한 유럽 각국은 프랑스에 군사적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외세의 군사적 간섭 때문에 총재정부는 점점 더 장군들의 무력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부상한 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그가 1799년 총재정부 일각과 손잡고 일으킨 것이 브뤼메르(안개의 달) 18일의 쿠데타이고 그 결과 나폴레옹 보나파트르가 제1통령이 된 통령정부가 수립되었다.

통령/황제였던 나폴레옹은 군사독재자였으나 프랑스혁명의 성과를 보존해 귀족들에게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고, 민법전을 만들어 재산권을 보장하였으며 부르봉왕가의 복귀를 막았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야망은 프랑스를 전쟁으로 몰고 가 나폴레옹 집권기에 숱한 프랑스인들(주로 앞길 창창한 젊은 남자들ㅠㅠ)이 러시아의 평원(러시아 원정)이나 스페인의 산악지대(이른바 반도전쟁, 여기서 나폴레옹은 그의 숙적 웰링턴과 대적한다)까지 끌려가 개죽음을 당했고(집권 전까지 치면 이집트 사막 포함) 전쟁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외세가 민 부르봉왕가의 복귀를 수용하게 되었다.

봉건왕조 부르봉왕가지만 형 루이 16세와 형수 마리 앙트와네트의 목을 백성들이 자르는 걸ㄷㄷㄷ 본 루이 18세는 혁명의 성과를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었고 탁월한 외교관 탈레랑 덕분에 패전국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빈 회의에서 열린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회의에서 나중에 1차대전 패전국인 독일 같은 취급도 안 받고 영토와 영향력을 보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 18세를 이은 샤를 10세는 형 같은 조심성 없이 혁명 후 26년을 무시하는 꼴통보수짓을 했고 이에 프랑스국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난 것이 1830년의 7월 혁명이다. 이 때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진 않고 대혁명초기에 혁명에 우호적이었던 왕가의 분파인 오를레앙가 후손 루이 필립이 왕이 되어 같은 왕정이라도 7월 왕정, 오를레앙 왕정이라고 해서 구분하고 사회적으로도 부르봉왕정복고 시절의 망명귀족 보다는 대은행가, 대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고 하겠다(영화 [레미제라블]은 이 7월 왕정 시기에 일어났다가 실패한 봉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7월 왕정은 18년을 유지하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붕괴한다. 이 해엔 프랑스에 자극받아 전 유럽서 민중들이 봉기해 '제(여러) 민족의 봄(Spring)'으로 불렸으나 반동세력에 의해 진압됐고(이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독일에서의 혁명에 참여했으나 좌절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프랑스의 제2공화정조차도 투표;로 나폴레옹의 조카를 선출.

프랑스 말도 잘 못했던(쿨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는 삼촌시절에 덕을 봐 향수를 느낀(!)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로 당선됐고 당선 후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으며(1851년 12월 2일, 이 날은 그의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트르트가 1804년에 황제로 취임한 날이기도 하고, 그 1년 후에는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이른바 3제(帝) 회전(會戰)이라고 불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격파한 날이기도 하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보나파르트가(家)에 의미가 있는 이 날을 일부러 쿠데타 날짜로 골랐다고 한다) 이 쿠데타에 반대한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렇게 제2제정을 열었으나 삼촌때의 영광을 재현하기는커녕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속아 먼저 전쟁을 걸었다가(보불전쟁) 세당에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겪어 제2제정이 붕괴(1871년)되었고, 프랑스에는 제3공화정이 수립되어 항복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파리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수립한 민중정권이 파리 콤뮨이다. 외세 프로이센군의 비호 속에 제3공화정은 잔인하게 동족인 파리콤뮨에 참여한 파리시민들을 대량학살해 '질서'를 회복하고 알자스-로렌땅을 독일에 떼주고 엄청난 배상금도 물어주었다.

제3공화정은 수립초기 이렇게 민중의 피를 손에 묻혀 인기 없었고 (부르봉)왕당파, 오를레앙파, 급진파등 좌우의 공격을 받아 불안했으나 유태인 하급장교 드레퓌스의 억울한 독일스파이누명을 지식인들과 급진공화파가 힘을 합쳐 벗겨준 드레퓌스 사건 후 프랑스 민주주의도 나름 자리를 잡아 제1차대전 때는 독일에 맞서 (상처뿐이란 비아냥도 있지만) 승리하며 성과를 보였고 1930년대에는 인민전선정부가 집권해 사회주의적 경향 및 노동계급의 요구까지 어느 정도 수용하는 폭넓음을 과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민주주의는 이웃 전체주의국가인 히틀러의 나찌 독일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해서 1940년에 나찌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제1차대전의 영웅이었던 폐탱 장군이 남부 비시정권의 수반이 되어 히틀러의 괴뢰 노릇을 하기까지 하는 흑역사;도 있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4년간 이렇게 프랑스는 나찌 독일지배를 받았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자고 일찍부터 주장했고 독일군을 상대로 부분적 승리를 거둔 후 3공화국 마지막 레이노 정부의 국방차관을 지낸 드골장군과 공산당 등 중심의 레지스탕스운동이 전개되었고 연합국 도움으로 해방되었다.

드골장군은 새로 성립된 제4공화정의 임시 수반이 되었으나 공산당 등 깨시민(응?)들의 혼란상이 꼴보기 싫다고 은퇴;했고 제4공화정은 내각제 하에서 날이 새면 정권이 바뀌는 혼란상 속에서도 베트남/알제리의 식민지를 유지하겠다고 버티다가 피압박민중들에게 발렸다-_-;

알제리주둔군이 물렁한 민간정부가 맘에 안든다며 알제리폭도;들 및 싸르트르 같이 이에 동조하는 프랑스내 좌빨;을 척결하자며;;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국내에서 호응한 군인들과 함께 은인자중하시던; 드골장군을 옹립해서 수립된 것이 프랑스의 제5공화정이다.

드골장군께서 대통령이 되시면 알제리와 프랑스는 하나;가 되고 싸르트르는 국가보안법위반 아니 국가반역죄로 처형;될거라고 프랑스 수꼴들은 환호했으나 장군은 알제리를 둘러 보고선 프랑스식민주의는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시키기로 결정했고 열받은 프랑스 수꼴들이 조직한 OAS와 드골장군의 5공화정은 거의 내전을 방불케하게 싸웠으며 장군은 몇 차례 암살 위험까지 넘긴 끝에 그들을 사실상 진압하였다.

핵실험성공과 나토 탈퇴, 영국의 EC가입을 거부해 드골은 프랑스의 위신은 높였으나 생활고와 높은 학비에 시달리던 프랑스 대학생들은 1968년에 거리로 뛰쳐나와 이른바 68년 혁명이 터졌고 파리에서 혁명이 날 때마다 등장하는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거리엔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으나 곧 실시된 선거에선 드골이 이겨 프랑스인들은 다시 멘붕ㅠㅠ하였다.

드골은 이듬해인 1969년 대통령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며 무상급식 아니; 국민투표에 대통령직을 걸었다가 져 사퇴했으나 그 뒤에도 보수파의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을 했고 사회당 집권은 81년 미테랑이 당선된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미테랑은 14년간 집권했으나 의회 다수당 지위를 보수파에 내줘 자크 시라크와 에두아르 발라뒤르가 보수파 총리로 좌우동거정부를 꾸렸고 95년엔 시라크의 보수파가 정권을 차지했고, 2002년엔 극우 국민전선이 1차투표에서 2위를 해서 사회당은 결선에도 못 오르는 수모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니콜라스 사르코지의 보수파정부를 한 번 더 거치고 나서야 프랑소와 올랑드의 사회당 정부로 다시금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선진국 프랑스 근현대사도 이리 흑역사와 굴곡이 많았음이 무더운 여름 답답한 청문회 정국과 세월호 특별법 제정도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이 길고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작은 위안이라도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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