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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20일 06시 37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8월 20일 14시 12분 KST

평양에서 '전쟁시대 일본'을 만났다

지금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평양 시민 대부분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으니까 안심"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 있을 때는 북한 사람들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건네보며 실감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본 젊고 예쁜 여자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김정은을 찬양하는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를 부르면서 감격한 듯 줄줄 눈물을 흘렸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도 그랬다. 대군(천황)과 일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쓴 수많은 유서를 보았다. 실제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젊은이가 적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체제가 무너지면 씌었던 귀신이 사라지듯 의식도 단번에 바뀐다. 사람이란 그런 법이다.

* 이 글은 올해 4월 26일부터 5월 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모리 다쓰야 감독이 허핑턴포스트 일본판에 쓴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평양의 풍경은 카키색. 도로는 넓고, 달리는 차는 별로 없다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 승객의 절반 이상은 뜻밖에도 유럽 관광객들이었다. 베이징에서는 약 2시간의 비행. 기내식은 종이로 싼 햄버거 하나. 토마토도 양상추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맥주는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 맥주를 마시며 햄버거를 먹으면, 조금은 색다른 맛인데 맛이 없지는 않다. 신기하게 맛있다. 무엇일까? 어쩌면 첨가물과 화학 물질의 맛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리운 맛이다.

공항에서는 조금 긴장했다. 왜냐하면 세관, 입국 심사 직원들의 제복이 군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리에는 군인이 많다. 게다가 일반 남성의 상당수는 인민복을 입고 있어서 멀리서는 군인과 분간할 수 없다.

평양의 첫인상은 카키색. 도로는 넓지만 달리는 차는 별로 없다. 몇 시간 전까지 있던 베이징의 도로는 수많은 차들로 만성적인 정체 상태였기 때문에 차이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버스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동은 어떻게 할까.

평양 시민은 무조건 많이 걷는다. 왠지 자전거도 벌로 없다. 오로지 걷는다. 뒷좌석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거리를 바라보던 내게 핸들을 잡은 와카바야시 씨가 "그들은 한두 시간 정도는 걸어 다닙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진에서 몇 번 접한 주체사상탑이 보였다. 근처에는 김일성의 거대한 동상이 솟아 있다. 옆에 한 명 더 있다. 김정일이다. 그렇군. 죽어서 동상이 됐구나. 그렇다면 김정은의 동상이 생기려면 아직 멀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마 이 나라에서는 이런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면 안 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은 이 나라에서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별로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도 그랬다. 천황(일왕) 사진이 학교 등에 배치돼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직원도 아동도 정중한 절을 강요당했다. 학교에서 불이 나 사진이 탔을 때는 교장이 할복자살했다. 화재로부터 사진을 지키려다 죽은 교장의 얘기를 신문은 미담으로 크게 전했다.

이런 것들을 모두 강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살은 몰라도 경례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자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적인) 속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예삿일은 아니다.

■ 납치 문제의 배경에는 강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

"우선 '일본인촌'에 갑니다"

핸들을 쥐며 와카바야시 씨가 말했다.

거울에 비친 와카바야시 씨는 방긋 웃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짧게 깎고 체구가 작은 그는 전직 운동선수처럼 날씬하다. 그는 1970년에 일어난 일본 항공기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다. '세계 동시 혁명'을 꿈꾼 일본 '적군파' 학생 9명이 도쿄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김포공항을 거쳐 평양으로 망명한 이른바 '요도호 사건'. 그때의 멤버는 9명이었지만, 지금도 평양에서 살고 있는 것은 와카바야시 씨를 포함해 4명이다. 나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룹의 현재 리더인 코니시 씨이다. 그리고 일본인 마을에서는 두 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일본인처'들이다.

1970년에 '세계 혁명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비행기를 납치해 평양으로 날아간 그들은 이제 자신의 사상과 행동의 잘못을 인정하고 복역을 각오하고 귀국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돌아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2002년에 드러난 일본인 납치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그들과 일본인처들 중 3명에게 구속 영장이 나온 것이다. 2007년, 제1차 아베 정권 시절이다.

그 사건은1980년 일본인 20대 남자 2명이 유럽에서 납북된 사건으로 일본 경찰청은 결혼 목적 유괴 혐의로 3명을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해 국제 수배했다. 이들 3명은 1980년 5월 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피랍자들을 만나 한 달 후 북한으로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요도호 사건으로만 복역하면 십 수년. 지금 돌아가면 죽기 전에 교도소를 나갈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은 고국에서 지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던 이들은 일본인 납치 혐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인터넷 등에서는 그들이 납치 공작에 가담한 것은 거의 틀림없다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그들이 받고 있는 혐의의 배경에는 상당히 강한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단언해도 좋다. 납치 문제는 1995년 '옴 진리교 사건'에 이어 일본 사회를 크게 바꾼 이슈였다.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일본 사회는 높아진 위기의식의 표적으로 오랫동안 일본인 납치를 계속해 온 북한을 발견했다. 9.11 후 미국을 들지 않더라도 위기의식을 느낄 때 국민들은 '가상의 적'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위정자를 강하게 지지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나 세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납치 문제는 실제로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북한 체류 중 일본인 마을의 숙소에도 묵었다. 말 그대로 요도호 멤버들과 침식을 같이 했다. 일본인 납치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여러가지 질문과 논의를 했는데,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모순이 느껴지진 않았다. 뭔가 속이거나 숨기려고 하는 사람의 언행과 표정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촬영이나 취재로 나름대로 쌓인 경험이 있다. 적어도 납치에 대해서 그들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원래 이 의혹 자체가 장대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 일본도 그랬다. 모든 것이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은 첫 방문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가봤다. 주체사상탑과 인민대학습당, 군사행진 등으로 유명한 김일성 광장과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이 우뚝 솟은 만수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에는 김일성의 할머니가 썼다는 지팡이가 전시돼 있는데, 왜 이걸 봐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개선청년공원(요컨대 유원지)에서는 제트코스터에 탔다. 거의 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식사는 맛있었다. 거의 매일 밤 맥주와 소주를 마시고, 마지막 코스는 냉면. 최근 개장한 '문수 물놀이장'에도 갔다. 온수 수영장과 워터 슬라이더가 있는 거대한 유원지이다. 정면의 문이 열리자 갑자기 김정일의 실물 크기 밀랍 인형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인민복을 입은 커낼 샌더스(KFC 창업주이자 로고 모델)인 줄 알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자 옆에 서 있던 위병이 강한 어조로 질책했다. 아무래도 절을 하는 것이 예절인 것 같다. 음. 소용없다. 낡은 격언이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

귀국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일반 국민과 이야기는 할 수 있었냐고 자꾸 물어왔다. 대답은 '예스'. 안내원(겸 통역)은 꼭 함께 행동하지만 "그럼 여기서는 알아서 행동하세요"라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안내원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촬영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안내원과 나눈 이런 대화가 기억난다.

"일반 시민을 찍어도 됩니까"

"그 사람이 양해했다면 OK입니다. 하지만 싫다고 하면 그만두세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어느 나라에서든 이게 당연한 예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말을 꺼냈을 때 일반 국민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오전 8시경에 카메라를 들고 주택가를 서성거렸을 때는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어 곤혹스러웠다. 외국인이 혼자 거리를 걸어 다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분명히 있을 것 같으니, 만약 당국에 통보돼도 불평은 못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속된 외국인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등에 느끼면서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가면 안내원과 와카바야시 씨가 생글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평양 시민 대부분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으니까 안심"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 있을 때 북한 사람들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건네보며 실감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다만 지방은 모르겠다). 식당에서 본 젊고 예쁜 여자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김정은을 찬양하는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를 부르면서 감격한 듯 줄줄 눈물을 흘렸다.

세뇌라는 말을 안이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 해외에서 오는 정보를 거의 못 듣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도 그랬다.

■ 그래도 왠지 납득이 안 간다. 뭔가 하고 싶다. 뭔가 바꾸고 싶다

북한에 오기 직전, 나는 가고시마 현에 있는 지람특공평화회관을 찾았다. 대군(천황)과 일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쓴 수많은 유서를 보았다. 검열도 있었고 유서에는 정형이 있어서 본심과는 다르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실제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젊은이가 적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체제가 무너지면 씌었던 귀신이 사라지듯 의식도 단번에 바뀐다. 사람이란 그런 법이다. 그리고 귀신에 씌었을 때 연료가 되는 것이 밖에서 자신과 동포, 국가를 위협하는 외적이다.

북한의 전승기념관에도 갔다. 북한의 현재 가상 적국은 미국이다. 어쨌든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의 위협을 강하게 내세운다. '가상 적국'의 잔학함을 강조한다.

침략에 대해서는 결단코 싸우겠다. 자위를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은 흉악하다. 적은 가차 없다. 대의는 우리에게 있다. 그러니까 싸우자... 그런 메시지가 가득 찬 많은 전시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상황 분석이 옳든 어쨌든, 자위를 위해서는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는 일본의 현 정권의 주장과 거의 다르지 않다.

결국은 자위 의식이다. 이렇게 사람은 전쟁을 일으킨다. 서로 상대방이 나쁘다고 하면서 서로 침략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청률과 발행 부수를 올리려는 언론의 보도에 국민은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지지율을 올리려는 위정자는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 9.11 이후 미국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인류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여행 끝에 내가 갖게 된 북한의 인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기내식 햄버거다. 먹어 보면 뜻밖에 맛있다. 그래도 왠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뭔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정치 지도자의 밀랍 인형에 인사하고 싶지 않다. 너무나도 군인이 많다. 무기와 동상에 쓸 돈이 있으면, 다른 데 써야 할 것이다. 직장이나 학교 등 집단 단위로 행동하는 일이 너무 많다. 남자지만 머리를 길게 기르고 싶다. 머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그 아무래도 좋은 것을 강제당하고 싶지는 않다. 인터넷으로 세계 정보를 알고 싶다. YOUTUBE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싶다. 나라를 사랑하니까 비판도 하고 싶다.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적어도 살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변했으면 한다. 뭔가 하고 싶다. 뭔가 바꾸고 싶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다시 베이징을 거쳐 귀국했다. 돌아오니 바로 총리가 TV에서 중국과 북한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집단적 자위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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