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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11일 13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8월 11일 14시 12분 KST

SM 해보셨나요?

흥미로운 건 저명한 여성 사회학자인 저자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현대의 애정관계와 한없이 권태로운 성생활에 대한 대안, 혹은 처방전으로서 '놀이 혹은 유희로서의 사도마조히즘'을 권한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섹스관계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얼룩지는 반면' 고도로 형식화된 BDSM은 '파트너의 역할과 위상'을 확실히 설정해 줌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오늘날 미국 인구의 5~10퍼센트 사람들이 사도마조히즘 섹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사도마조히즘이 일종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진부해도 정상적인 섹스에서 되려 안정감을 느끼는 '미개한 국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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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에로 연애소설' 3부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해서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일반의 성도덕과 삐딱하게 대립하는 이 작품은 서로 속박하고 학대당하는 가운데 쾌감을 느끼는, 'BDSM'이라는 은밀하고 괴이한 성생활을 중심으로 한 어느 남녀의 연애 이야기다. 'BDSM(구속과 순종,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이라는 단어가 낯설다면 그냥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 'SM'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순결한 여대생이 돈 많은 부자 청년과 노예 계약을 맺고 결박당한 채 매를 맞으면서 쾌락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며 자아정체성을 찾는다는 이 소설이 <해리포터> 시리즈와 비슷한 속도로 많이 팔려서 영어권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이해가 되나? 난 안 된다. 너무도 낯설고 기이해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실제로 그 책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회학자가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에바 일루즈의 신작 <사랑은 왜 불안한가>는 일명 '엄마 포르노'라고 불리는 '그레이' 시리즈가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는지 주목하며 현대인의 섹스와 애정 생활의 짐작하지 못했던 어떤 차원을 폭로한다.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그레이 시리즈'는 여성이 여성을 위해 쓴 소설이다. 그것도 아마추어 여성 작가가 인터넷 게시판에 평범한 여자들을 위해 쓴 소설. 이 때문에 사도마조히즘적 섹스를 전면에 내세운 에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인기를 누렸다. 그래서 '엄마 포르노'라고 한다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엄마들의 폭발적인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낸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이 책은 포르노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익히 아는 통념 즉 전형적인 연애 소설적 요소를 모두 갖춘 러브스토리다.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 '그레이'가 평범한 여자들이 남성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 사랑 없이 오직 즐거움과 기분 전환을 위한 사도마조히즘적인 섹스를 선호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젊고 매력적인 데다가 무엇보다 막강한 경제력과 정력을 자랑하는 최상류층 남자다. 그런 남자가 모든 평범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내심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거나 충분할 정도로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자 '아나'를 선택한다. 심지어 사랑 없이 시작한 가학과 피학의 변태적 섹스 게임이 처음엔 쾌락으로 그 다음엔 사랑으로 변한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오로지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섹스에만 집착하고 사랑을 기피하던 남자가 변한다. 한 여자에게 헌신하는 지극히 낭만적인 애인으로의 변신! '신데렐라'로 대표되는 진부할 정도로 흔해 빠진 러브스토리라는 말이다! 다만 "빅토리아 시대의 남자가 자신의 연정을 시와 꽃다발로 증명했다면 '그레이 시리즈'에서는 남자가 연인에게 바이브레이터와 항문섹스, 그리고 헬리콥터 소풍으로 대신한다"고 에바 일루즈는 재치 있게 폭로한다.

한편 이 문제의 책은 포르노라기보다 '할리퀸'류의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이면서 '에로티시즘의 자기계발서'에 가깝다니 재밌다. '포르노'가 외로운 남성에게 성적 자극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책은 상대방이 섹스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끌어올릴 기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독자들에게 매우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란다. 일례로 이 책이 출간된 후 '눈가리개'나 '회초리' '나를 묶어줘 세트' 같은 성인용품 매출이 미국에서 급증했다. 심지어 소설에 나오는 모티브에 맞춘 특별한 옷차림과 호텔방을 찾는 마니아들이 있는가 하면 '그레이 시리즈' 팬들을 위한 공식적 편집 음악 앨범까지 나왔단다.

흥미로운 건 저명한 여성 사회학자인 저자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현대의 애정관계와 한없이 권태로운 성생활에 대한 대안, 혹은 처방전으로서 '놀이 혹은 유희로서의 사도마조히즘'을 권한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섹스관계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얼룩지는 반면' 고도로 형식화된 BDSM은 '파트너의 역할과 위상'을 확실히 설정해 줌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국내에서도 출판된 '그레이 시리즈'는 반응도 판매도 영 시원치 않았다. 왜일까? 오늘날 미국 인구의 5~10퍼센트 사람들이 사도마조히즘 섹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사도마조히즘이 일종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진부해도 정상적인 섹스에서 되려 안정감을 느끼는 '미개한 국민'일 뿐이다.

에바 일루즈라는 여성 사회학자의 가장 신선한 주장은 '평등이 섹스 욕구를 퇴색시켰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남녀평등은 그다지 섹시하지 못하다는 지적. 동의한다. 그렇다고 굳이 민망한 것은 물론 돈 아깝게 성인용품 매장을 찾을 필요는 없을 터다. 오늘 밤 당장 아내든 연인이든 당신 옆에 누워 있는 여자의 눈을 땀에 젖은 당신의 손수건으로 가리고 손은 넥타이로 묶어보자. 그리고 명령하는 거다. "자, 말해. 내 옷을 찢고 날 정복해달라고." 일종의 게임이며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로서의 섹스! 흠, 확실히 남녀평등보다는 섹시하게 느껴진다.

하긴 내 평생 가장 섹시하게 느껴졌던 남자는 영화 <프라하의 봄>(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 작품) 에서 자유분방한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로 분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여자에게 이렇게 명령할 때였다. "옷 벗어(take off your clothes)."

사랑이 왜 불안하냐고? 말년에 애견 카레닌의 죽음을 지켜보며 테레사(토마스의 외도 때문에 늘 괴로워하고 불안해 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테레사)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나 고양이에게 그러듯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그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

에바 일루즈에 의하면 '그레이 시리즈'는 조악한 문학이다. '지극히 평균적인 정신의 소비자를 위한' 기만적인 자기계발서이며 유행을 타는 일종의 문화상품. 그런데 '평균적인 정신'이 뭐냐고? 에바 일루즈의 표현에 의하면 이렇다. '자기 계발이라면 무조건 혹하는 소비자'. 끝으로 자기계발서라면 일단 제쳐두고 보는 비평균적 사람으로서 내가 '그레이 시리즈' 대신 권하는 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섹스를 일종의 놀이이며 동시에 인문학으로 즐기는 엄청나게 섹시한 상류층 남자와의 연애 이야기를 통해서 진짜 뭔가 배우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내가 느낀 바 밀란 쿤데라의 책 중에서 유일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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