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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11일 06시 1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8월 11일 14시 12분 KST

오늘도 걷는다

찬찬히 전경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했다. 전경이 들어가 그림이 엉뚱해지는 게 아닐까? 분위기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하하 근데 이게 웬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이 그림 속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화면이 꽉 차는 느낌이다. 활기도 느껴진다. 2014년 서촌을 기록할 때 서촌 곳곳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한 풍경일 듯 싶다. 그들의 존재가 싫든 좋든 말이다. 그들도 매일매일 서촌을 걸으며 2014년 서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그리다 전경에게 쫓겨나기도 한 그림. 지난 4월 2일 '그림 그리길 허하라'와 4월 15일 '그림 그려도 된대요!'에서 이야기했던 그 그림 말이다.

한 달여간 미국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참여연대 그림교실 전시회 날짜가 잡혔다. 마감일은 다 됐는데 시차가 바뀌어 펜을 잡고 앉아도 일찍 곯아떨어져버린다. 최종 마감일 새벽. 스케치북을 다잡고 앉았다. 여기저기 명암을 더 넣어주고 가다듬어본다. 뭔가 부족하다. 영추문 앞으로 다시 뛰어나가 볼까? 찍어둔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 보다 문득 잡히는 게 있었다.

전경! 어느 각도에서 찍은 컷이든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 풍경에는 혼자이거나, 두명씩 짝을 지어 걷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보인다. 찬찬히 전경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먼저 실루엣을 그리고, 옷을 입혔다. 두 명이 다니는 팀을 그릴까? 하다 그냥 한 명을 그려 넣기로 한다. 조마조마했다. 전경이 들어가 그림이 엉뚱해지는 게 아닐까? 분위기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하하 근데 이게 웬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이 그림 속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화면이 꽉 차는 느낌이다. 활기도 느껴진다. 인왕산과, 메밀꽃 필 무렵과, 기왓집과, 2014년 서촌과 썩 잘 어울리는 풍경을 연출해낸다.

사람 그리는 게 제일 어려웠다. 사람이 많은 풍경을 그릴 때도 사람은 빼고 풍경만 그렸다. 다른 사물에 비해 사람 그리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에 대해 고참 화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사람은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정교한 표정을 가졌다는 거,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잘 아는 물체이기 때문에 잘못 그리면 금방 알아채버리기 때문에 더 그리기 어렵다는 거... 등등의 이유들을 들었다.

Olin Library/ 2014, 2014, 40㎝x30㎝, 펜

지난 5월 딸이 다니는 미국 대학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그 대학 도서관을 그린 일이 있었다. 딸에 대한 애정을 담아 도서관을 한 땀 한 땀 그리는 일은 꽤 행복했다. 건물 창문 하나하나, 계단 한 층 한 층, 도서관 앞 잘생긴 나무 하나하나 열심히 그렸다. 그런데 마무리하려니 뭔가 허전했다. 나무 잎사귀도 좀 더 그려보고, 도서관 지붕에 명암도 더 줘봤지만 아무래도 심심하다. 그때 바로 무릎을 탁 치며 아하~!!! 도서관 앞 벤치에 학생 한 명을 그려 넣었다. 잔디밭에 누워 책을 눈높이로 세워 책 읽고 있는 친구도,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친구들도 그려 넣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갑자기 도서관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때의 경험이 서촌 풍경에 전경의 모습을 그려 넣을 용기를 내게 불어넣어줬다.

그림 제목을 '인왕산은 알고 있다' 로 하려다가 '오늘도 걷는다'로 정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말이다. 2014년 서촌을 기록할 때 서촌 곳곳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한 풍경일 듯 싶다. 그들의 존재가 싫든 좋든 말이다. 그들도 매일매일 서촌을 걸으며 2014년 서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도 걷는다/2014, 40㎝x30㎝, 펜&수채

'오늘도 걷는다'가 완성되기 전의 모습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