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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4일 11시 13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6월 04일 14시 12분 KST

리스본 그 단골집

여행에서도 단골집을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로를 알기 전까지는. 여행지에서의 단골집이 의미가 있을까? 무의미하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로의 누노와 호르헤를 만나기 전까지는.

김민철

하루는 남편과 나란히 식탁에 앉아 뭔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신중했고, 진지했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일요일 오후, 우리는 우리 동네 단골집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짬뽕집 아줌마도 우리를 안다고?"

"당연히 알지."

"그렇게 손님이 많은데?"

"아니야, 지난번에는 우리 둘이 늘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인사까지 건네셨어."

"그래? 그럼 단골이네. 앗싸. 단골집 하나 추가."

동네 단골집이라고 해서 거창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준 하나, 우리가 자주 가는 곳. 기준 둘, 주인 아저씨 아줌마가 우리의 얼굴을 아는 곳. 딱 두 개였다.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망원동에서 단골집이 하나 늘어갈 때마다 우리는 기꺼이 기뻐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이 동네에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진짜 동네 토박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단골집 하나 더하는 것이 우리에겐 튼실한 뿌리 하나 내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여행에서도 단골집을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로를 알기 전까지는. 여행지에서의 단골집이 의미가 있을까? 무의미하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로의 누노와 호르헤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계속 '마르셀로'라 불렀지만 정식 이름은 'MARCELINO PAO&VINHO'. 바로 리스본에서 우리가 묵었던 작은 골목 끝에 있는, 걸어서 20초 거리의 작은 바였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알파마지구, 그 한 가운데에 숙소를 잡은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수십 번을 헤맸고 우리가 어딘지조차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겨우 집 근처에 왔다 싶을 때 우리는 작은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었다. 아마추어의 연주 같기도 하고, 기타 조율하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정체불명의 소리는 그다지 정열적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피곤한 우리에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라. 몰입했던 여행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도대체 누가 열정만 가득한 아마추어의 연주를 들으며 달갑지 않은 호응을 해주고 싶겠느냐는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딱 한 잔만 더 하고 집에 돌아가자는 눈빛을 주고 받고 그 바에 들어섰다.

바는 작았다. 테이블은 단 세 개. 카운터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우리와 눈을 맞췄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가운데 테이블에 우리는 앉았다. 좋으면 호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끼리 대화를 하며 간간히 박수만 쳐주면 될 일이었다. 어쨌거나 음악이 있다는 건 나쁜 게 아니었으니까. 리스본에 도착한 첫 날, 우리에게 그 정도의 낭만은 필요했으니까. 우리는 샹그리아 두 잔을 시키고 편안하게 앉았다.

그리고 기타를 든 남자가 비로소 노래를 시작했다.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포르투갈어.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남자의 음악은 나서지 않았다. 손님에게 음악에 집중할 것을 강요하지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작은 바 전체를 조용히 나지막이 감쌌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남편의 눈 표정은 흐뭇했다. 그러면서 막 나온 샹그리아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우리는 다시 눈을 마주쳤다. 이런 샹그리아는 처음이었다. 포도주가 아닌 산딸기와 석류로 만든 빨간 상큼한 시원한 깔끔한 아니 그러니까 형용할 수 없는 샹그리아. 음악도 좋고 샹그리아도 좋고 바도 좋고 그도 좋고 리스본도 좋고 그러니까 다 좋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샹그리아를 한 잔씩 시켰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때마다 뮤지션은 '오브리가도'라며 부끄럽게 인사했고, 주인장은 서비스 안주도 내왔다. 유럽에서 서비스 안주라니. 우리는 이마를 탕 쳤다. 이게 뭐야. 유럽이잖아. 웬 서비스 안주.

주인의 이름은 누노 마르셀리노. 뮤지션의 이름은 호르헤 리보티. 호르헤는 무려 자신의 자작곡들로 완성한 CD도 가진 뮤지션. 우리는 기꺼이 호르헤의 CD를 사서 밤 늦게 마르셀로를 나섰다. 왠지 다음날도 또 올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을 가지고. 또 헤매도 어쩔 수 없지, 라는 심정으로 마르셀로 옆 골목으로 접어들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 눈 앞에는 우리 집 대문이 보였다. 우리는 웃으며 말했다. "뭐야. 우리집에서 20초도 안 걸리는 곳에 있잖아."

리스본에 5일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마르셀로에 4번을 갔다. 첫 번째는 우연이었고, 두 번째는 계획적이었고, 세 번째는 네 번째는 안 갈 수 없어서 갔다. 마치 마르셀로에 도착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계속 갔다. 그리고 여행 중 가장 마법 같았던 모든 순간들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나조차 믿지 못할 그런 밤들은 모두 마르셀로에서 일어났다. (*가장 마법 같았던 밤은 다음 글에서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리스본 그 단골집에서 일어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년 후, 리스본으로 신혼여행 간다는 친구에게 마르셀로를 소개해줬다. 친구는 마르셀로에 갔고, 우리의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마르셀로를 우리의 단골집이라 부르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리스본에도 우리의 튼실한 뿌리 하나를 내린 이 기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틈만 나면 이런 대화를 주고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셀로는 언제 다시 가지?"

"올해 다시 가볼까? 이번엔 호르헤의 집에서 자볼까?"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