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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9일 12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9일 14시 12분 KST

결코 여행지에 도착하지 않기 위하여

단 며칠짜리 집이라도 우리 집이 필요했다. 비슷하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도시마다의 시장에 갔다가 돌아올 골목이 필요했다. 양손 가득 낯설고 궁금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올 대문이 필요했다.

김민철

"떠난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라는 말에 도착한다.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 유목민은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떠나기만 하는 여행자도 없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문제는, 어디에 도착하냐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지 이미 도쿄에서 깨달아버렸다. 일상을 떠났으면서 다시 일상에 도착하고 싶다는 이 모순.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어느새 내 여행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방법부터 달라져야 했다.

가장 먼저 내가 바꾼 것은 숙소였다. 분명 호텔의 미덕이 있다. 하얀 시트와 깨끗하게 정리된 방과 푸짐하게 차려낸 아침.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말끔한 얼굴들. 누군가는 호텔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서울이나 파리나 도쿄나 다 같은 얼굴을 한 호텔방이 아니었다. 하얀 호텔방의 익명성이 아니었다. 멸균된 그 공간을 거치지 않고 속살로 직행하고 싶었다.

답은 집을 빌리는 것이었다. 단 며칠짜리 집이라도 우리 집이 필요했다. 비슷하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도시마다의 시장에 갔다가 돌아올 골목이 필요했다. 양손 가득 낯설고 궁금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올 대문이 필요했다. 서툰 실력으로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부엌이 필요했다. 신기한 맛의 음식을 앞에 두고 술 한 잔을 할 테이블이 필요했다. 그 음식보다 더 맛있을 창 밖 풍경이 필요했다. 너무 좋은 집은 부담스러웠다. 너무 비싼 집도 필요 없었다. 그런 집은 나의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깨끗해야 했다. 남의 허물까지 치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상을 꿈꾸어도 이건 여행이니까.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여행책 맨 앞 장에 나와있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곳에 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일상의 속살로 직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알파마 지구였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도 살아남아 이제는 리스본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동네였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낡아 가장 아름다워져 버린 알파마 지구. 왠지 그곳에는 내가 꿈꾸는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 검색 끝에 우리 집을 구했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아저씨에게 집 주소를 보여주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파마 지구에 도착해서도 아저씨는 몇 번이나 창문을 내리고 사람들에게 집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 와중에 차를 향해 노란색 트램이 달려왔고, 그때마다 아저씨는 곡예를 하듯 차를 다른 골목으로 비켜 세웠다. 택시 아저씨도 헤매는 동네였다. 지도가 없으면 무능해지는 동네였다. 지도가 있어도 바보가 된 기분으로 한참이나 헤매야 하는 동네였다. 분명 손 끝으로 지도를 짚으며 들어선 골목이었지만, 어느새 지도에는 없는 길이었다. 갈림길에서 잠시만 방심하면 어디론가 끝없는 오르막길이 되었고, 잠시만 한눈 팔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졌다.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광장에서 한 길만 안으로 들어서면 한적한 주택가였고, 누군가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골목에는 어김없이 낡고 허름하고 아름다운 벽들이 이어졌다.

그 한가운데 우리 집이 있었다. 무거운 문을 열고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좁은 계단을 오르면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없을 것 없는 우리 집이 나타났다. 베란다에 나와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바로 아래층 식당 아저씨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무심하게 빨래를 널던 옆집 아줌마가 부러웠던 날엔 우리도 질세라 빨래를 해서 빨래 줄에 걸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렇게 많이 불었던 건지. 동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빨래는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날려갔나 봐. 어떡해." 라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우리 문고리에 매어놓은 우리 빨래를 보았다. 아마도 아래층 식당 아저씨의 선행이었을 것이다.

많이 피곤했던 날에는 해가 지기도 전에 집에 들어왔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해가 질 때쯤이면 자켓도 걸치지 않고 집 앞에 뛰어나갔다. 집 바로 앞 광장에서는 리스본 시내 전체를 배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호사가 집 앞에서 예사로 일어났다. 관광객들과 함께 해지는 모습을 보고 난 후, 마치 우리는 이 동네 주민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집이었으니까. 어느새 우리에게는 알파마 지구의 지도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관광객들이 다 돌아간 밤이 되면 알파마 지구도 조용해졌다. 그 고요한 공기를 깨는 건 노란색 트램이었다. 그럼 우리는 동전지갑만 들고 그 골목 끝의 마르셀리노로 향했다. 누노와 호르헤를 만나러 밤마다 마르셀리노에 갔다. 그렇다. 알파마 지구에는 우리 집도 있었고, 우리 단골 집인 마르셀리노도 있었다. 처음 내 예감이 맞았다. 리스본에서 우리 집이 있어야 할 단 하나의 동네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알파마 지구였다.

(*마르셀리노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all photos by 김민철)

세빌리아에서는 궁전, 성당, 과달키비르 따위를 무시해버리고 나면

삶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유쾌해진다.

- 장 그르니에 『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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