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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02일 14시 44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02일 14시 12분 KST

나는 왜 채식'지향'주의자가 되었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벌떡 아침에 일어나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하게 되었을리는 없다. 그 생각을 한 건 10여년전 쯤 광고 회사를 다니던 시절, 식품 회사의 광고건으로 이런 저런 자료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동물보호단체 PETA 의 동물 사육과 도축 영상 때문이었다. 충격적이었다.

Shutterstock / Photographee.eu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엄격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런 일은 대체 얼마나 의지가 강하고 단단해야만 할 수 있는 건가. 동물성 식품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 내 주변의 비건 (Vegan, 고기와 생선, 유제품과 꿀도 먹지 않으며 가죽 제품 등 동물성 제품들도 사용하지 않는 채식주의자) 들을 볼 때마다 존경스럽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그저 단순히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된 - 그러니까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 먹지 않는 - '채식지향주의자' 라고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 라는 단어를 쓰기 주저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정치적 의미와 주장, 사람들이 편견처럼 떠올리는 이미지가 아직은 부담스럽고 어려우며, 그렇게 진지한 것 또한 내 타고난 성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나는 혀에 혓바늘 대신 닭살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에겐 너무 거창한 단어다. 그래서 사람들이 "채식주의자인가요?" 라고 물으면 약간 망설이며 "고기는 되도록 먹지 않아요." 라고 대답한다. 조금 뻔뻔할 수 있는 날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 없이 그저 돈의 원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동물의 분노와 괴로움이 담긴 고기는 먹고 싶지 않아서라는 설명 정도를 가벼운 말투로 붙인다.

또한 비겁하게 채식'지향'주의자라는 라벨을 붙이는 만큼 가끔 친구들을 만났을 때 테이블 위에 친구들이 주문한 흥미로운 고기 요리가 등장하면 한 입씩 먹기도 한다. 요리를 좋아하고 또 글 쓰는 것과 함께 요리도 일인 나로서는 - 심지어 첫번째 책 <이기적 식탁>에서는 눈 앞에 있는 음식이라면 뭐든간에 우선 입안에 넣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나로서는 - 이 호기심을 참기가 참 힘든데, 물론 이렇게 먹고 나면 참 기분이 좋지 않긴 하다. 고기로 낸 육수가 들어간 음식 같은 건 너무 까탈스럽지 굴고 싶지 않아 그냥 먹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분도 좀 있기 때문인데, 지나치게 음식을 가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자꾸 보여주게 되면 그들로하여금 나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채식을 해 볼까? 같은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리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나의 이런 선택 때문에 식당 하나 정하는데도 한번 더 신경 쓰게 만드는 게 꽤 큰 민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하게, 쉽게, 가벼운 마음으로 채식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채식이란 건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여전히 그렇다. 고기를 참기가 쉽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고기의 맛을 잊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특별히 몸이 힘들어지거나, 배가 더 고프다거나, 기운이 없지도 않으며 반대로 그렇게 몸이 좋아진다는 느낌도 없다. 난 원래 좀 둔한 스타일이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지만, 어쨌건 나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없으니 육체적으로 힘들 것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정말 어려운 부분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이걸 하고 있는지, 채식'지향'주의자로서 단지 식생활만이 아닌 모든 소비에서 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선을 긋고 지켜야 나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내가 보내야 하는 메시지는 어느 정도여야 거부감이 없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어렵다. 이제 1년 반쯤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흔들거리고 주춤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1년 반 전, 호기롭게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내 머릿속이 이런 고민으로 끊임없이 복잡해질 줄은 몰랐다. 그저 고기만 먹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고기는 동물, 생명 뿐 아니라 지구와 환경,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어느날 갑자기 벌떡 아침에 일어나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하게 되었을리는 없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기에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한 건 10여년전 쯤 광고 회사를 다니던 시절, 식품 회사의 광고건으로 이런 저런 자료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동물보호단체 PETA 의 동물 사육과 도축 영상 때문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물론 나도 스티로폼 접시에 랩으로 싸여진 빨갛고 먹음직스러운 그 마블링 덩어리가 원래는 누렇고 부드럽고 따뜻한 털과 그렁그렁한 착한 눈을 가진 아름다운 생명이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시골에 조부모님이 계셨던 어린 시절 덕분에 나는 닭을 잡는 것도, 심지어 돼지나 소를 잡아 먹는 잔치도 자주 보았다. 하지만 뭐랄까, 그때의 소와 닭과 돼지들은 행복하게 시골에서 여물을 먹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음식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우유 광고 속 젖소들이 항상 푸른 초원에서 행복하게 풀을 뜯고 있는 것처럼. 한 번도 이 고기가 잔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건 보기좋게 포장한 거짓 이미지였을 뿐이었다. '고기 공장'의 실체는 전혀 달랐다. 돼지는 마취도 없이 펜치에 꼬리가 잘리고, 닭은 부리와 발톱이 잘린다. 이 지면보다 작은 우리에서 닭은 털도 없는 맨 목을 앙상하게 드러내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지고, 고급 송아지 고기 (veal) 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우리에 갇혀 있다가 몇 십일 후 도축된다. 뒷 다리에 올가미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머리에 망치를 얻어 맞고 죽는다. 닭들은 털을 뽑기 위해 먼저 도축되고 뜨거운 물에 넣어지는데 운 없는 몇 마리는 산 채로 뜨거운 물에 들어가게 된다. 몇 분 되지 않는 이 영상 속에 어디에도 내가 알던 그 시골의 "동물" 은 없었다.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먹는다는 것은 다른 생명으로 내 생명을 이어 나가는 것" 이라던. 하지만 우리가 먹던 그 고기들은 전혀 생명이 아니었다. 그저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자재' 였다. 그 후로 나는 한 달쯤 고기를 먹지 못했다. 먹지 '않았다'기 보다는 먹지 '못했다'가 더 정확했던 것 같다. 그저 충격 때문이었으니까. 역시 시간이 지나자 나는 다시 숯불 위의 삼겹살을 맛있게 먹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게 무엇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나요? 라고 물었을 때 이 페타 영상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첫째 고양이 씨씨가 지금 나를 키워냈지요, 라고.

9년 전 나는 내 첫번째 고양이 씨씨를 만났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고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고양이를 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늘 동물을 좋아해왔다. 어렸을 적 가장 좋아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동물의 왕국" 같은 동물 다큐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같은 것들이었다. 종종 길에서 어미 잃고 다친 새끼 참새 같은 것들을 가져와 동물병원에도 데려가곤 했다. (그때마다 수의사들은 별 수 없으니 그냥 버리라고 해 나에게 번번히 상처를 주었다.) 첫째 고양이 씨씨를 데려오고 몇 달 후 나는 두번째 고양이도 들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는 또 한 마리의 고양이를 부른다는 세상의 규칙 대로 차근차근 늘어나 지금은 고양이가 네 마리가 되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푹 빠졌고 심지어는 고양이에게 보내는 연서격인 나의 두번째 책 <이기적 고양이> 도 쓰게 되었다.

<이기적 고양이> 중 내가 써놓고 뻔뻔하게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사랑하게 되자 세상 모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상깊은 구절로 꼽는 문장인데, 왜냐하면 모두들 그렇기 때문이다. 씨씨와 메, 번개탄과 아톰을 만나고 나는 길거리 구석에 숨어있는 고양이 꼬리도 찾아내는 능력을 얻었다. 내 가방에는 늘 고양이 캔이 들어있게 되었고, 급기야는 빌라나 아파트 대신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을 얻어 마당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차려놓고 밥집 아줌마를 자처하게 되었다. 내 고양이만을 돌보면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고양이 덕분에 길거리의 모든 고양이들이 눈에 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 고양이와 길고양이는 똑같은 아이들이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한 마리로 나는 세상 모든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첫번째 책 <이기적 식탁> 에는 '파트타임 베지테리언' 이라는 글이 들어있다. 본격적인 채식은 하기 힘들어서 일주일에 한 두번만이라도 채식 식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어렴풋이나마 고양이와 내가 먹는 동물의 다름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게 이때쯤이었다.

그리고 작년 봄에 만난 나의 개, 봄이 이야기가 남았다. 유기견이었던 봄이를 집에 데려온 첫날, 나는 막연하게 오늘부터 더이상 고기를 먹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한창 읽고 있던 조나단 사프란 포어의 채식과 동물에 대한 에세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도 한 몫 했으리라. 조나단 사프란 포어는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에게 우리가 먹는 고기와 희생되는 동물과 생명 존중의 딜레마를 설명해 주기 위해 이 책을 쓰기로 했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양이만을 사랑할 대상으로 보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사람에게 버림받은 유기견을 안타까운 생명이라고 생각해 데려왔으면서 동시에 똑같이 고기 공장의 지옥으로 처참하게 버려지는 다른 생명의 괴로움을 외면하는 게 갑자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어려운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42킬로그램의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인 내 개가 한 마리의 누런 송아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기도 하고. 하하하.

이게 내가 오늘의 내가 된 대략의 사정이 되겠다. 결국 조그만 고양이 한 마리때문이라고 할 만 하지 않은가? 이제 글의 시작 쯤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다. 채식은 쉽다. 먹던 대로 먹으면서 고기만 밀어놓으면 된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내 입 속으로 들어가는 식탁 위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두는 순간 그때부터 어려워진다. 지난 1년 반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동물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한 이후로 세상은 아무리 착한 일 마저도 모순 덩어리이고, 나 역시 쉽게 살려고 그 모순에 은근슬쩍 알면서도 발을 넣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보통 사람들보다 다섯 배쯤은 더 자주 느끼며 산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친환경 샴푸와 자연 분해되는 세제를 해외 배송 받을 때, 이 물건이 여기까지 오는데 들었을 제트연료와 비행기가 만드는 온갖 공해와 반면 보통의 샴푸와 세제가 초래하는 동물실험의 폐해와 환경 오염 중 어느게 더할지 갈팡질팡하는 일쯤은 별 거 아니다. 그때마다 자괴감 같은 게 느껴지거나 차라리 몰랐던 때가 더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들을 몰랐으면 길고양이들의 처참한 삶에 분노하고 울지도 않았을 거고, 봄이를 몰랐으면 한 해에 10만마리의 개가 버려지고, 절망하고, 죽임당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며, 난 아직도 일요일 아침에 SBS 의 <동물농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을 다 몰랐다면 나는 미디엄 레어로 구운 아름다운 스테이크를 온 마음을 다해 남김없이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 고기를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되어서 먹지 않기로 한 셈이다. 기왕 내 앞에 나온 접시에 담긴 고기가 있다면 남김없이 즐겁게 음미해주는 게 차라리 죽은 소에게 더 예의바른 것일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안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생명을 대하는 예의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이 너에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남에게 행동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비단 사람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인생에 할 일이, 테니스를 배우면 테니스를 칠 줄 안다는 게 내 소개에 추가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 더 늘어난 것 뿐이라고. 테니스를 치면 몰랐던 바람을 느끼게 되고, 공 때문에 하늘을 더 자주 보고, 내리쬐는 햇볕이 매 시각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고 더욱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채식을 할 줄 알게 되면서 다른 것을 이전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게다. 세상을 다르게 보아서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게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않게 됨으로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게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다는 걸 알았다. 착하고 유별나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하고 싶어서일 뿐. 그리고 내 옆에는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준 동물들이 있었을 뿐.

* 이 글은 <페이퍼> 2013.6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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