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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 소주 한 병, 그리고 설렁탕 한 그릇

지난 회식 자리. 내게 선택권이 돌아왔다. 이번엔 막내가 좋아하는 가게로 가 보자며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골라보라는 말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종로에 있는 단골집으로 팀원들을 안내했다. "넌 어린애가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이제 보니 아저씨 입맛이네."

  • 손수현
  • 입력 2018.01.29 11:18
  • 수정 2018.01.29 12:00

지난 회식 자리. 내게 선택권이 돌아왔다. 이번엔 막내가 좋아하는 가게로 가 보자며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골라보라는 말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종로에 있는 단골집으로 팀원들을 안내했다.

"넌 어린애가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이제 보니 아저씨 입맛이네."

뜨끈한 게 먹고 싶을 때마다 찾는 설렁탕집은 손님의 절반 이상이 나이 지긋하신 아버님들이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소개하기엔 조금 투박한 면이 있었다.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식당은 그날도 띄엄띄엄 혼자 식사를 하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넘치도록 담긴 진한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으로 고된 하루를 모두 씻어내는 듯했다. 소주 한 잔을 무심하게 입 안으로 툭 털어 넣고, '크' 소리와 함께 국물 한 번을 떠먹으며 그렇게 1시간쯤 머물다가 '덕분에 잘 먹고 갑니다'하며 홀연히 가게를 떠났다. 또래에겐 다소 낯설 수 있는 풍경이지만, 내겐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자, 이렇게 깍두기 국물을 먼저 부은 다음에 파를 듬뿍 넣어 먹는 거야."

설렁탕을 처음 먹어보던 날, 아빠는 세 발 자전거를 알려주듯 더 맛깔스럽게 먹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낯선 재료들에 당황하다가 이내 국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파를 젓가락으로 다 솎아내곤 진한 국물 속에 숨겨진 소면만 후루룩 건져 먹었다. 식감이 익숙지 않았던 수육도 아빠 그릇으로 모조리 옮겨 담았다. 소면을 다 먹고 나면 반쯤 남은 국물은 본 체 만 체, 숟가락을 툭 내려놓고, 발 디딜 틈 없는 가게 안을 쓱 둘러보곤 했다.

코끝 빨개지는 바깥 날씨와는 달리, 가게 안은 따뜻한 공기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가득했다. 그 사이로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희끗한 머리에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들은 잘 모르는 건너편 사람들과도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릇째 국물을 들이키시곤, 나란히 일어섰다. 오늘도 참 잘 먹고 가요, 그 말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옆자리도 또 그 옆자리도, 테이블 위의 그릇들은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는 잘 몰랐다. 소금을 잔뜩 넣어야만 맛있다고 느껴졌던 국물이 언제부턴가 그냥 먹어도 참 고소하다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파의 아삭함이, 깍두기 국물의 얼큰한 맛이, 그리고 그곳의 풍경이 그리워진 순간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이야. 진짜 깊네, 깊어. 아버님이 어릴 때부터 데리고 오실 만하네. 근데 이게 그때부터 맛있었어?"

"아뇨. 어렸을 때 아빠 따라 몇 번 왔던 게 다였는데, 스물네 살 땐가.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이 가게가 갑자기 생각났어요. 되게 추운 날이었는데, 뜨끈한 국물이랑 노곤한 풍경, 그게 딱 떠오르는 거예요. 그날 알았던 것 같아요. 이게 아빠가 좋아하던 그 맛이구나. 요즘은 파도 잔뜩 넣어서 먹는다니까요."

그렇게 아빠와 함께 찾던 가게들은 자연스레 나의 단골집이 되었다. 밍밍했던 평양냉면이, 비릿했던 닭백숙이 생각나는 날도 잦아졌다. 그때는 왜 이 맛을 몰랐을까. 그때의 아빠처럼 나는 깍두기 통과 양념통을 죄다 들고, 먹어봐 먹어봐, 이렇게 해서 먹어야 더 맛있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50년, 100년이 훌쩍 넘은 가게 안에는 아빠의 시절과 나의 시절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한 곳을 지켜온 가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누군가의 추억을 끌어안은 채 더 굳건히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의욕이 없거나 기운이 없는 날엔 이렇게 사람들이 가득한, 오래된 가게에 와봐. 시장도 괜찮아. 생기 가득한 음식들과 분위기를 가만히 느끼다 보면 저절로 괜찮아지는 때가 있어."

설렁탕은 물론 회나 수육 같은, 비릿한 맛이 나는 것은 입도 대지 못했던 엄마도 아빠를 따라 처음 이곳에 오게 됐다고 했다. 이 음식이 주는 맛, 이 가게가 갖고 있는 분위기가 좋아지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이 느낌이 엄마도 종종 생각이 난다고 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그곳 만의 분위기가 때론 사람의 입맛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바꿔놓는 듯했다.

"어떤 음식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는 가게는요?"

누군가의 입맛, 누군가의 단골가게라는 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소소한 질문에 대해 곧바로 답할 음식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그 입맛은 누구의 입맛을 닮았으며, 그 오랜 추억은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진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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