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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전' 시작과 함께 울린 사이렌...정현은 듣지 못했다

  • 김원철
  • 입력 2018.01.25 12:14
  • 수정 2018.01.25 12:18

2018 호주오픈에 출전중인 정현(22·한국체대)이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 대회 4강 신화를 달성했지만 안타깝게도 멜버른 현지에서 취재중인 국내 중앙언론사 기자는 거의 없다. 테니스 전문지 '테니스피플' 박원식 편집국장(전 한겨레 기자)은 대회 시작과 함께 현지에서 정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박 국장이 ‘현장에서 본 정현’을 한겨레에 보내왔다. -편집자의 말

거의 매주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다니며 경기를 치르는 테니스 선수들은 도착지가 한국인지, 호주인지 구분이 안가야 선수 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먹던 음식만 고집하면 투어 생활에 지장이 많다. 정현은 대회가 열리는 나라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일부러 한식을 찾아 다니지 않는다. 이번 호주오픈도 마찬가지다. 딱 한번 중국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큰 경기를 앞두고 위에 부담을 주는 스테이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24일 테니스 샌드그런과의 8강전이 끝난 뒤 정현은 스트레칭을 하고 마사지를 받았다. 그리고 페더러와의 경기를 하루 앞둔 25일 연습 일정을 잡지 않고 푹 쉬었다. 노박 조코비치와 16강전을 치른 다음날도 그랬다. 연습보다는 푹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잘 먹고 푹 쉰다. 그리고 최대한 경기에 방해되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덕분에 정현은 코트에 들어서면 경기 집중을 잘한다. 한 포인트도 그저 흘려 버리는 것이 없다. 샌드그런과의 8강전 시작과 함께 상대 선수가 서브를 넣으려는 순간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렸다. 나중엔 알려진 일이지만 경보 오작동이었다. 관중들이 웅성거렸지만 정현은 상대 서브 리턴을 어떻게 할까만 골몰했다. 정현은 그랜드슬램 4강까지 올랐는데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다. 로저 페더러와의 4강전도 그저 테니스 선수와의 경기일 뿐 특별할 것이 없다는 태도이고, 뭐라도 하나 배우겠다는 자세다.

혼자 있을 때도 정현은 무의시적으로 뭔가 꼼지락댄다. 자세히 관찰하면 습관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밖으로 접었다폈다 하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테니스하기에 최적의 몸을 만든다.

정현의 별명은 잘 알려진대로 ‘교수님’이다. 시력 교정 때문에 착용한 안경 때문인데, 실제로 곁에서 지켜본 정현의 행동은 ‘교수님’같다.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다.

정현은 이번 호주오픈을 통해 스타가 됐다. 하지만 실력뿐 아니라 인성과 매너에서도 전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페더러를 닮아가고 있다. 그는 우선 상대 선수를 배려한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큰 경기를 이기면 코트에 큰 대자로 눕거나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하는데 20대 초반의 한국 청년은 그렇지 않다. 라켓을 들고 손 한번 가볍게 흔드는 것이 승리 뒤풀이의 전부다. 상대 선수가 코트를 완전히 빠져 나가고 장내 아나운서가 정현의 이름을 부를 때 그제서야 만세를 부른다.

팬들에 대한 배려도 남다르다. 수백통씩 쏟아지는 축하 문자에 일일이 답을 해준다. 관중들이 내미는 사인과 사진 요청도 정성스럽게 대한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도 이 곳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승리한 뒤 1만 여명의 관중 앞에서 영어 질문을 알아듣고 영어로 답하는 것은 우리나라 테니스 선수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정현은 유머있고 재치있는 답변으로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답지 않게 품위를 지키면서도 멋이 넘친다.

정현을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로 만든 힘은 정신력과 허벅지다. 그는 어려서부터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경기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위기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멘탈도 익혔다.

정현의 굵은 허벅지도 다른 나라 테니스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짧은 정현은 튼튼한 허벅지를 만들었다. 정현의 코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네빌 고드윈이 정현의 신체적 특징을 간파한 결과다. 고드윈 코치는 타점을 조금 더 높이 가져갈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한 끝에 정현식 서브자세도 만들었다.

정현이 테니스 다음으로 공을 들이는 것이 치아 교정이다. 삐뚤빼뚤한 치아를 바로잡으려고 대회가 끝나고 귀국하면 언제나 치과를 찾는다. 이번 호주오픈을 마치면 다음 대회까지 여유가 좀 있는데 이번에도 귀국하면 치과를 찾을 예정이다.

이 곳에 온 한국 테니스 관계자들은 ‘깜짝 스타’가 된 정현이 앞으로 어떤 태도를 가질지 궁금해 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정현이 결코 거들먹거리거나 건방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자신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에 흔들리거나 슬럼프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정현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무덤덤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정현은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프로 선수이기 때문에 코트에서 보이는 내 모습 하나하나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 나는 내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다. 그것이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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