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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삭제한다는 충남도의회

이제 충남은 "인권조례를 폐지한 지자체"로 세계에 알려지게 생겼다. 세계 곳곳에서 인권 규범이 새롭게 제정되었다는 소식은 들어봤지만, 멀쩡한 인권 규범을 폐지했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어디에나 인권에 시큰둥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감히 그런 역주행을 상상하진 않는다.

충격적인 문서다. "충청남도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안. 의안번호 677호." 충남인권조례 폐지가 가시화된 것이다. 일부 단체가 충남인권조례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민원을 제기할 때만 해도 설마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조례 폐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일침을 놓았을 때만 해도 한풀 꺾이는가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폐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지난 16일 충남도의원 40명 중 25명이 충남인권조례 폐지안을 발의한 것이다.

제안 이유를 찾아보니, 충남인권조례로 인해 도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도민 뜻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조례를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갈등을 핑계로 댔지만 그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부 개신교단체들이 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한다면서 조례 폐지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그 요구가 수용된 것이다. 발의안에 "동성애를 조장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으니, 이건 기만적인 걸까, 아니면 그 정도 염치라도 있으니 다행스러운 걸까?

발의안에는 조례 폐지에 따른 공백이 걱정이 되었는지, 조례가 폐지되더라도 충남 인권정책은 헌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헌법과 법률을 지자체 수준에서 구체화한 인권조례를 굳이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이 조례폐지안 발의를 주도한 자유한국당 충남도당은 동성애/동성혼을 조장하는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이 충절의 고장인 지역 정서에 맞지 않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윤리규칙 20조에는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발의에 가담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당 윤리위원회에서 신고라도 해야 할까?

이쯤 되면 충남인권조례에 무슨 해괴한 규정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하지만 충남인권조례에는 충남에서 헌법, 법률, 국제인권법에 따라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제도들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문제의 '성적 지향' 조항은 조례가 아니라 '충남도민 인권선언'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인권선언을 이행하는 것이 충남인권조례이니 조례 자체를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차별금지 사유인 성적 지향을 문제 삼는 것도 황당하고, 그 한 조항 때문에 이미 다양한 인권증진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는 조례 자체를 폐지하겠다는 발상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조례가 폐지된다면 최악의 선례가 될 것이다. 인권 규범을 '갈등 상황'이라는 이유로 폐지한다는 선례, 너무나도 고약하다. 최근 유엔은 지방정부에서의 인권 실현에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2013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방정부와 인권' 결의안을 채택했고 본격적인 인권도시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한국은 그 인권도시 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국가 중 하나이며, 그중에서도 충남은 아주 모범적이었다. 충남만큼 인권에 관한 인프라가 체계적으로 갖춰진 곳은 전국적으로 봐도 손으로 꼽는다. 안희정 지사는 작년 유엔 인권이사회 인권패널 토의에서 한국의 지방정부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조례 폐지는 그런 성과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제 충남은 "인권조례를 폐지한 지자체"로 세계에 알려지게 생겼다. 세계 곳곳에서 인권 규범이 새롭게 제정되었다는 소식은 들어봤지만, 멀쩡한 인권 규범을 폐지했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어디에나 인권에 시큰둥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감히 그런 역주행을 상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충남도의회가 그걸 하겠다는 것이다. 충남에서 인권이 삭제되는 것을 이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이건 더 이상 충남만의 문제가 아니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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