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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한양대 음란물 제작 피해자들의 분노

  • 김원철
  • 입력 2018.01.21 11:46
  • 수정 2018.01.21 11:47

한양대에 다니는 ㄱ(24)씨와 가해자는 페이스북 친구 사이였다. “친구 신청이 와서 봤더니, 같은 교내 활동을 하는 학교 후배더라고요. 잘 알지는 못해도 후배니까 신청을 받았었어요.” 지난달, ㄱ씨는 가해자가 자신의 페이스북 사진을 유출해 소위 ‘지인능욕’ 트위터 계정에 합성을 의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인능욕’ 계정이란 이용자의 의뢰를 받아, 이용자 지인의 사진을 음란물과 합성해주는 계정이다. 가해자는 페이스북에 올린 ㄱ씨의 여행 사진 합성을 의뢰하며 “뒹굴고 싶어서 동남아만 다니는 년”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서울의 한 대학에 다니고 있는 ㄴ씨(22)가 가해자를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께였다. 대외활동을 하면서 두 시간 남짓 함께 활동한 것이 전부였는데, 지난달 자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지인능욕’ 계정에 쓰였다는 연락을 다른 피해자를 통해 듣게 됐다. “소식을 듣자마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가해자가 대외활동을 할 때 찍은 사진을 전달해주겠다며 굳이 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었거든요. 알고보니 제 사진을 이런 식으로 쓰려고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한양대 남학생의 지인사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사건 피해자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는 지난 12일 만들어졌다. 한양대에 재학 중인 남학생이 지인들의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해 온 사건을 규탄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직접 만든 페이지다. 지난 19일 '한겨레'와 만난 피해자들은 “피해자가 많고 서로 연락처를 알 수 있어서 용기를 내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었다”면서도, “다들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인 피해와 충격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한양대 남학생의 지인사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사건 피해자모임’ 제공

■ “가해자·피해자 분리 필요…퇴학 조처해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가해자가 유포한 사진을 피해자가 직접 발견하지 않는 이상 피해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탓이다.

가해자는 지난달 21일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분실했다. 이튿날 아침 휴대폰을 주운 습득자는 피해자 중 한 명에게 연락했다. “사진첩을 우연히 확인했는데, 본인이 합성된 사진이 있어 경찰에 신고해야 할 것 같아 연락했어요.” 습득자에게 폰을 건네받은 피해자는 증거물을 남기기 위해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사진과, 텔레그램·트위터 등으로 지인 사진 합성을 의뢰한 메시지 등을 모두 촬영했다. 합성사진에는 피해자 각자의 개인정보에 더해 ‘걸레변기창년’, ‘섹스중독 성노리개’등의 문구가 함께 적혀 있었다.

피해자는 증거물에 남아있는 연락처를 바탕으로 다른 피해자들을 초대해 단체 카톡방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16명이다. 사건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페이스북 페이지도 만들었다. 피해자들은 페이지에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자보를 게시하고, 카드 뉴스의 형식으로 사건일지와 가해자의 합성 의뢰 메시지를 재구성해 올렸다. 각각의 게시물은 적게는 3천여개, 많게는 6천여개의 공감을 받으며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피해자들은 한양대학교에서 가해자를 퇴학 조처할 것과 가해자의 공개 사과문 게시를 촉구하고 있다. ㄴ씨는 “만약 학교에서 정학 처분이 나오게 되면 가해자는 군대에 다녀오거나, 다른 학교에 편입하면 된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학교에서 퇴학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을 접수한 한양대 양성평등센터는 가해자가 속한 단체를 관리하는 부서에 가해자의 학내 공식활동 중단 및 공식일정 참여 제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상태다. ㄱ씨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단과대 징계위원회에 해당 사건이 접수된 상태”라며 “그나마 피해자가 강하게 나서야 조치가 취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21일 기준 트위터에 ‘지인능욕’이라고 검색할 경우 나오는 계정들. 트위터 갈무리

■ ‘지인 음란물 합성’, ‘음화제조’에 불과?

지난달 23일 피해자들은 성동경찰서에 가해자를 고소했다. 사흘 뒤인 27일 경찰 조사에 출석한 가해자는 “호기심에 그랬다”는 주장을 반복했다고 한다. ㄱ씨가 말했다. “에스엔에스 메시지를 보면 2015년부터 지속적으로 합성 사진을 의뢰해왔거든요. 이렇게 오랫동안 악질적으로 합성 의뢰를 해온 걸 단순히 호기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난달 31일, 피해자들은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가해자 어머니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응하지 않았다. 가해자의 어머니가 가해자 대신 사과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압수수색 결과가 나오기 전 가해자 쪽을 만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지난 16일까지 가해자의 공개 사과문 게시를 요구했지만, 가해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현행법상 가해자가 받을 처벌 수위는 명확지 않다. 가해자가 사진을 유포했다는 증거가 없을 경우 사이버명예훼손이나 음란물유포죄가 아닌 ‘음화제조’ 정도의 혐의만 적용되는 탓이다. 형법 제244조(음화제조)는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의 여파(활동가명) 사무국장은 “사이버 성폭력은 특히나 법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소위 ‘지인능욕’이라고 불리는 음란물 사진 합성도 사이버 성폭력의 범주 안에서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적용을 받도록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현재 한사성에서 법률 지원 등의 도움을 받고 있다. 경찰은 혹시 모를 합성사진 유포의 증거를 찾기 위해 가해자의 휴대폰과 노트북, 외장하드를 압수해 디지털포렌식 분석 중이다.

‘한양대 남학생의 지인사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사건 피해자모임’ 제공

■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을까 두려워”

‘피해자’가 된 피해자들의 일상은 무너졌다. 지난 17일, 페이스북 페이지 ‘한양대학교 대나무숲’에는 피해자들의 활동을 비난하는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왜 한양대 남학생들이 통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지 궁금하네요. 이슈화를 시키기 위해서 한양대 남학생이라는 큰 프레임을 갖고 가는 것인가요?…왜 애먼 사람들을 묶어서 욕을 하게끔 만드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ㄱ씨가 말했다. “익명의 공간에서 사실이 아닌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피해자를 비판하는 2차 가해가 이뤄지고 있어요. 피해자가 직접 피해 증거들을 모으고, 피해 사실을 입증하고, 피해 내용을 공론화하는 것도 힘든데,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부정적인 여론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이 사건에만 매몰된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ㄱ씨는 최근 억지로 자격증 학원을 등록하는 등 일상생활도 돌보기로 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일부러 ‘지인능욕’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 ‘능욕’의 사전적 의미는 ‘여자를 욕보임’이라는 뜻으로, 주로 합성사진을 제작하는 가해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에서다. 피해자들은 한목소리로 “현행법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건 공론화에 앞장서고 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크고 힘든 게 사실이에요. 만약 이대로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으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는 상황이 되는거죠.”(ㄱ씨)

“사건 이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계속 피하게 되고, 모르는 카톡방에 초대되는 것도 무서워요. 피해자가 조심한다고 해서 (디지털 성범죄가)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요.”(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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