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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비서의 로맨스? 케케묵은 판타지!

ⓒ한겨레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저글러스: 비서들>은 비서와 보스의 연애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제목은 여러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처럼 여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비서들을 가리킨다. 드라마는 초반에 비서 좌윤이(백진희)가 보스의 사생활을 챙기느라 자신의 사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고충을 보여준다. 그는 보스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 믿으며, 봉 상무의 불륜을 감춰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혹자는 드라마가 불륜 치다꺼리나 하는 비서를 보여주며 비서노동을 폄하한다고 비판했지만, 불합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극한의 업무환경을 여성 노동자의 입장에서 고발하는 것은 필요하다.

드라마는 곧 좌윤이가 ‘보스와의 불륜’이란 추문에 휩싸여 대기발령 당하는 것을 보여주며, 선연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즉 보스의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비서노동은 연애와 오인되기 쉽기에 방지책이 필요하며, 추문에 휩싸일 경우 약자인 여성 노동자만 불이익을 당한다는 교훈을 던진다. 하지만 이후 드라마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탈각한다. 가까스로 복직된 좌윤이는 남 상무(최다니엘)의 비서가 되어 ‘노오오력’ 하는데, 이 과정에서 보스와 연인이 된다. 드라마는 장르의 작법을 십분 활용하여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담는데 과정이 매끄러울수록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남 상무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사람들을 기피하는 이혼남이다. 그는 조직생활에 능숙한 임원들이나 이를 돕는 비서들에게 반감을 지닌 채 좌윤이를 내친다. 만약 여기서 좌윤이가 전문적인 비서 능력을 발휘하여 남 상무를 감화시켰다면 비서노동의 전문성이 부각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좌윤이가 남 상무에게 준 것은 감정노동과 보살핌이고, 둘이 급격하게 친해진 계기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얽히는 것이다. 즉 좌윤이는 직장에서는 남 상무를 살뜰하게 챙기는 비서이고, 집에서는 잔소리를 하거나 일상을 공유하며 로맨스를 키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남자의 사회생활을 뒷바라지하는 비서이자 집에서는 안주인 역할을 하는 젊은 여성의 존재. 즉 가부장적 이성애 관계의 모델이다.

드라마는 대사를 통해 비서노동이 연애감정이나 사적 관계로 오인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언급을 담는다. 하지만 서사를 통해 비서노동이 연애로 수렴되는 것을 보여준다. 좌윤이가 비서노동을 열심히 한 결과, 첫번째는 불륜으로 오인받았고, 두번째는 진짜 연애가 되었다. 두 경우의 구조는 같고 상대가 다를 뿐이다. 애초 보스와의 연애는 불가하다던 좌윤이의 좌우명은 사라지고 오직 비밀연애가 밝혀져 다시금 추문에 휩싸이지 않을까만 중요해진다. 이는 비서노동의 완벽한 수행은 연애로 귀결되며, 이를 방지하려는 금기는 무효함을 방증한다.

드라마는 또 다른 비서-보스 관계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철부지 재벌 3세 황보 이사(이원근)의 89번째 비서 왕정애(강혜정)는 전업주부로 살아오다가 동생의 신분을 도용해 취직했다. 그는 사회생활의 경험이 전무하지만 아들을 키운 관록으로 황보 이사의 호감을 산다. 식당에서 생선가시를 발라주고, 엄마의 제삿날에 밥을 차려주는 왕정애에게 모성결핍을 지닌 황보 이사는 연정을 품는다. 이는 비서노동이 궁극적으로 엄마노동과 같음을 뜻한다. 또한 황보 이사의 연정은 엄마를 대리하는 여자를 꿈꾸는 미성숙한 남성의 판타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판타지는 직장 안의 여성 노동자들을 애인이나 엄마 같은 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왜곡된 시선을 강화하며, 가뜩이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생활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 밖에도 드라마에는 온갖 성차별적이고 퇴행적인 요소가 엉켜 있다. 남 상무를 회사로 데려온 부사장은 그의 전 장인이다. 이혼 뒤에도 장인-사위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결혼에서 여성은 매개물이었을 뿐이고, 남성들 간의 유사부자적 유대가 중요했음을 뜻한다. 또한 좌윤이의 비밀연애를 폭로하여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친구인 마보나이다. 전형적인 ‘여자의 적은 여자’의 구도이다. 가장 끔찍한 장면은 사장 비서가 비서들을 옥상에 집합시키고 군기를 잡는 모습이다. 젊은 여성 일색의 비서 사회에서 보스의 지위가 곧 비서의 지위라는 질서는 상궁과 궁녀가 등장하는 사극을 연상시킨다. 기업 소유주인 황보 일가의 ‘양반 코스프레’는 또 어떤가. 자본주의 사회의 직장 문화가 전근대적 신분질서를 모방하는 것은 당연한 듯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 명백한 퇴행이다.

이쯤 되면 보스와 비서의 로맨스에 환호할 게 아니라, 보스와 비서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공사의 구분 없이 젊은 여성들의 그림자노동으로 중년 남성들을 떠받들어 자신의 일상조차 챙기지 못하는 이들을 출세시키는 구도가 과연 옳은지, 남성 보스와 여성 비서라는 불평등한 젠더 관계를 이상적인 이성애 모델인 양 제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촛불을 들었던 이유는 공사의 구분 없이 권력과 업무가 비공식으로 배분되며, 세습적인 신분질서가 고착화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장뿐 아니라 생활세계의 촛불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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