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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인터뷰]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을 통해 살펴본 용산참사 그 이후의 이야기

  • 강병진
  • 입력 2018.01.20 05:51
  • 수정 2018.01.24 12:21

2009년 1월 20일 오전 7시 20분경.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불이 붙었다. 망루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시가 용산 재개발 사업 인가를 내준 후 용산 4구역의 세입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재개발 보상대책에 동의할 수 없었다. 2009년 1월 19일, 용산 4구역의 세입자들과 다른 지역에서 철거민으로 살던 사람들이 모여 망루를 짓고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약 25시간 후 경찰이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물대포가, 위에서는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의 경찰특공대가 망루를 에워쌌다. 그리고 불이 났다. 6명이 사망했다. 5명은 용산 4구역 세입자와 전국 철거민 연합회 소속 사람들이었고, 다른 1명은 경찰특공대원이었다. 참사 원인에 대해 철거민들이 가지고 있던 화염병과 시너가 문제였다는 주장과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였다는 주장이 맞섰다. 검찰은 화재 책임이 철거민들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26명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관련자들은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돼 실형 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어느새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재판이 끝났고,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은 실형을 살았다. 또 시간이 흘러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아있다. 경찰 특공대 투입을 누가 결정했는지, 또 이들의 진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엇보다 진짜 화재 원인은 무엇인지. ‘경향신문’에 따르면, “지금 용산 철거민들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와 비슷한 형식의 조사위원회에서 참사의 진상규명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관련한 법안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 가운데 여전히 그날의 망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은 바로 그들의 현재와 내면을 쫓아가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당시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던 이충연과 다른 지역의 철거민대책위원회 소속이었지만 그날 연대 투쟁을 했던 김주환, 천주석, 지석준, 김창수 등이다. ‘공동정범’을 공동연출한 김일란, 이혁상 감독은 지난 2012년,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통해 용산 참사의 진상을 그려낸 바 있다. ‘두 개의 문’은 참사 당시 남일당 건물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칼라TV, 사자후TV, 채증동영상, CCTV)들이 촬영한 것과 경찰의 채증영상,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의 증언과 당시 무전 내용등을 조합하면서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려한 작품이었다. 이들은 ‘두 개의 문’ 이후의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충실한 자료가 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지만,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발견한 또 다른 참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었던 사람은 죄책감에 빠져있고, 또 어떤 이는 밤마다 경찰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자신을 도와주고 죽은 사람에 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하던 이는 자신의 기억과 다른 기록에 혼란스러워하고, 망루에서 살아남았지만 몸이 아픈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각자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른 이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또 다른 갈등이 드러난다.

9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이유는 9년 전의 참사가 또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용산은 여전히 또 다른 폭력의 가능성이 있는 땅이다. 용산참사 9주기를 4일 앞둔 지난 1월 16일, 한 언론사가 이 가능성을 증폭시켰다. 당시 기사는 평창올림픽 때 외국인 관광객을 실어나를 KTX가 지나는 용산역 인근 한강로3가를 보여주며 “열차 창문 밖으로 무너져가는 노후 주택과 녹슨 철제지붕, 폐타이어와 쪼개진 기왓장이 그대로 보인다. 멀리 보이는 한강트럼프월드 등 고층 빌딩들과 겹쳐지면 서울은 엄청난 빈부 격차를 지닌 도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중략…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만들어진 것은 도심 역세권 개발 지체의 산물이다. 2007년 시작된 용산 개발이 막혀버린 탓이다”라고 적었다. 많은 사람이 그날의 참사를 잊었다고 볼 수밖에. 그래서 재개발의 뒷심으로 국민에게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이 또 다시 생겨날지 모른다고 걱정할 수 밖에. ‘공동정범’을 연출한 김일란, 이혁상 두 감독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공동정범'의 공동연출자인 이혁상 감독(왼쪽)과 김일란 감독

- ‘공동정범’은 ’두 개의 문’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다른 화법과 주제의 이야기입니다. ‘두 개의 문’이 참사의 진짜 가해자가 누구인지 몽타주를 그리는 작품이었다면, ‘공동정범’은 참사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관한 이야기 같습니다. 출소한 철거민들을 만나면서 지금의 ‘공동정범’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김일란 | ‘어떻게 시작했나’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언제 사랑에 빠지셨어요’라는 질문을 듣는 것 같아요. 그처럼 명확한 계기가 잘 떠오르지 않아요. 2012년쯤이었던 것 같아요. ‘두 개의 문’의 상영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는데, 이 영화의 성과에 비해 실제 현실의 변화가 피부에 와닿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만 뜬 거 같고, 마음이 복잡했어요. 실제 운동으로의 의미는 조금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었죠. 다시는 안 하려고 하면서도 또 언제든 다른 작품으로 이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사실 이렇게 기억을 다시 정리한 것도 이혁상 감독이 얘기해줘서 알았어요.

이혁상 |  김일란 감독은 언제나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세요. 늘 뭔가 주절거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자주 이야기하죠. 언젠가는 이 사람이 또 일을 내겠구나 생각했던 건, 2012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두 개의 문’으로 초청을 받아서 함께 호주에 갔어요. ‘공동정범’에도 나오는 이충연씨와 아내분인 정영신씨도 함께 갔었죠. 정영신씨는 참사 이후에 항상 ‘용산 며느리’란 이름이 따라다녔어요. 한국에서도 언제나 이와 관련된 일에서는 ‘며느리’처럼 이런저런 일을 했는데, 호주에서도 그러시더라고요.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다 하려고 했어요. 사실 그 자리에서는 감독들과 같은 입장에서 초청된 거 였는데도요. 또 그때는 정영신씨가 활동가로서도 열심히 일할 때였거든요. 그때 김일란 감독이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가 저렇게 평생을 용산 며느리로 살아가야하는 게 안타깝다. 내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지나가면서 했어요. 그때 저는 뭔가를 하겠다는 그것이 ‘두 개의 문2’ 혹은 ‘공동정범’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김일란 | 저는 기억 못 했는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후에 3주기 관련 영상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때 남일당 일대를 가보니 전체가 폐허가 되었고, 수풀이 자라고 있었어요. 그 풍경을 보니까 되게 쓸쓸하기도 하고 여기에서 원혼이 못 떠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쓸쓸하고 무섭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으로 추모 영상을 만들려고 했죠. 그때는 주변에 철조망이 있어서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럼 드론을 한번 실험해보자는 생각도 있었죠. 그런데 2주 뒤에 망루에 계셨던 분들이 출소를 하셨어요. 우리는 2009년부터 연대를 해왔기 때문에, 일단 이분들의 기억을 기록해두자는 생각에서 촬영을 시작한 거죠.

- 단순한 기록으로 시작한 촬영에서 이분들이 갖고 있는 고통이 드러난 순간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김일란 | ‘공동정범’에서 화초와 달팽이를 키우는 분으로 나오는 김주환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였어요. 그분이 “우리 이야기는 언제나 용산에서 빠져있다”고 하셨어요. 대부분의 사람과 언론은 용산에서 터를 잡고 살았거나, 그곳에서 장사를 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는 거 였어요. (김주환씨는 신계동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 9년 전 그날 연대투쟁을 하기 위해 함께 망루에 올랐다.) 연대하기 위해 오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결국에 죄가 된 것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용산 분들 보다 더 희생하신 게 있어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 이야기는 빠져있다”고 하신 거죠.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이지? 했어요. 연대하러 오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왜 서운하다고 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분들 입장에서는 후회와 자책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연대를 하러가자고 했던 게 참사의 시작이었으니까요. 아내가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와서 함께 했는데, 결국 그분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우리마저 이분들의 이야기를 생략하면 안되겠구나 생각했어요. 또 그즈음 이혁상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분들 모두 이 영화를 ‘우리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이충연씨의 기억을 중심으로 나머지 분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려한 계획을 바꿔서 다섯 분 모두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어요.

 

이혁상 | 저는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사건들이 있었어요. 저에게는 참사라고 여겨질 수 있는 일들이 있어서 한동안 힘들었는데, 김일란 감독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죠. 그때 저는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이면, 이분들의 트라우마나 고통에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의 생각과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던 거죠. 그분들의 고통에 내 고통을 감히 견주면 안 되는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굉장히 오만한 출발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그동안 유가족 중심으로 피해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데에 반성했어요. 그분들의 감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죠. 이 다큐가 감당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고통이 전이되는 느낌도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먼저 이런 감정을 컨트롤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 ‘공동정범’을 보면 나오는 분들 모두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지점을 드러내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혁상 |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인물과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한데, 그런면에서 저희는 좀 이점이 있었어요. 2009년부터 연재를 해왔고, ‘두 개의 문’도 만들었으니까, 더 수월한 분들이 있었죠. 그런데 사실 무엇보다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언제나 용산 내의 사람들, 그리고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이고, 그때 아버지를 잃었던 이충연씨를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니까, 연대해서 참사를 겪은 분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고통을 삼켜올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을 때,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어요.

김일란 |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분들에게는 그냥 사는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오늘 아침밥은 어떻게 드셨어요?"라고 물어보면, 그분들은 "여기가 너무 쓰려서 밥을 못 먹었어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일상의 이야기였던 거예요. 당신의 고통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어요. 그냥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어보면 그분들은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들은 저희와 관객들은 고통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거죠. 이야기를 듣는 상황이 그리 극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분들은 언제나 그런 고통과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혁상 |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려웠던게 이충연씨였어요. 방어기제가 너무 강하게 작동하시는 거죠. 

 

김일란 | 맞아. 충연씨는 ‘잘주무셨어요? ‘라고 물어보면 ‘네 잘잤어요’ 이렇게 대답하곤 했어요. 힘든 게 없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괜찮다고 했죠. 이충연이라는 사람에게는 힘든 것도 돌볼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이 어느 정도로 짓눌려있는지를 자각할 수도 없는 상태였어요.

- ‘공동정범’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각자 가진 일상적인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나중에는 이충연씨와 다른 연대 철거민 네 사람과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반목이 있었다는 것도 인터뷰를 해가면서 알게 된 건가요?

이혁상 | 그렇죠.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거치던 도중 한, 두 분씩 이충연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용산 철거민들은 왜 그러냐고.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이라고 해야되는 거 아니냐고. 어떻게 출소 후에 연락도 한번 없냐고. 흔히 말하는 ‘인지상정’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방향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그런 갈등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걸 다큐멘터리로 완성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김일란 | 나는 아닐 것 같은데?

 

이혁상 | 그래? 계속 했을 거 같애?

 

김일란 | 어.  제가 독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웃음)

- 그분들이 서로에게 가진 감정의 골을 보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김일란 |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연대했던 철거민분들이 옹졸하다고 생각했어요. 연대에 대한 대가를 원하는 건가? 무엇을 알아달라고 하는 거지? 우리는 지금 재개발의 모순과 싸우고 있고, 용산참사 진상규명이 너무나 중요한 상황인데, 뭘 알아달라는 거지? 라고 생각을 하다가 그분들의 입장에 더 다가가면서 이런 나의 생각이 서운하다는 거구나라는 걸 깨달었어요. 지금 당신들이 나를 보는 그 시선이 서운하다는 거였죠. 다른 언론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분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던 거예요. 이걸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또 한 번 뒤집혔죠.

 

이혁상 | 사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어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신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영화에 나오는 분들이 어느 회의실에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다 끄집어 놓는 장면을 찍을 때 였어요. 그때 저희 제작사인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이 다 투입돼서 촬영을 했는데, 사람들이 다 나가버리고 우리만 남았을때 한 촬영감독이 갑자기 오열을 하는 거예요. 영화에는 짧게 나왔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분들의 갈등이 매우 큰 충격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더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 감독으로서는 이 작업이 매우 어려운 미션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갈등을 목격했지만, 이 영화가 나서서 그분들을 화해시킬 수도 없는 거니까요.

 

김일란 | 맞아요.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할 거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이 현실을 어떻게 할 거냐가 문제였어요. 다큐멘터리로서 밸런스를 맞추는 게 어려웠죠. 이 지점에서는 신세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용산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분들, 그리고 제 주위에 있는 여성주의자 친구들에게 피해와 가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배제된 부분들을 다룰 때의 윤리에 애해 조언을 많이 구했어요.

- 다큐멘터리로서 ‘공동정범’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여러 인서트 장면이나 편집에서 인물의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점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고민에서 나온 선택이었나요?

김일란 | 영화의 중심이 용산참사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겪은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그분들의 내면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이혁상 감독이 현장에서 촬영할 때, 그런 내면의 풍경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담아내려고 했죠. 김주환씨의 경우는 집에서 달팽이를 키우시는데, 달팽이를 정말 많이 찍었어요. 손톱만 할 때부터 완전 커졌을 때까지 다양하게 찍었죠.

- 아마도 ‘공동정범’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지금 영화에 나오는 다섯 분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제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어느 정도는 풀었을까요?

이혁상 | 오늘은 같이 MB 건물 앞에 가서 시위도 하셨어요. 만남은 이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요. 지금은 9주기 추모기간이니까 그런 것도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이 분들에게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2016년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하기 전에 다섯 분만 모시고 시사를 했어요. 그때가 이 분들이 처음으로 온전하게 평화롭게 만났던 것 같아요. 저희가 영화를 찍을 때는 각자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다섯 분 모두 나에게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처음 알게 되신 거죠.

- 영화를 본 이충연씨의 반응이 어땠을 지 궁금합니다.

 

김일란 | 충연씨는 자신이 다른 분들을 탓하는 게 정당하다고 믿는 게 있었어요. 그 계기 중 하나가 2014년 1월, 용산참사 4주기 때 다른 분들이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사실 다 사정이 있었어요. 김창수씨의 경우는 아내가 아픈 상황이어서 용산 근처로도 오지 않았어요. 마음은 그런 게 아니지만, 아내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충연씨 입장에서는 그분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서운함이 있었을 거예요. 자신에게는 진상규명이라는 대의가 있었으니까, 그 서운함이 정당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올 수 없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고, 각자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거죠. 민망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어요.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서 탓하기만 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던 것 같아요. 영화제에서 상영이 끝난 후에는 울기도 했었죠.

이혁상 | 사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가 그분들을 극적인 화해로 이끌 수도 없은 거고요. 그렇게 깊은 상처와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이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완성은 이제부터 그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이충연씨가 앞으로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주장했던 진상규명이라는 대의명분을 지켜가는 건, 그분의 몫이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너무 낙관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김일란 | 그 미움이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최근 시사회떄 김창수씨랑 김주한 위원장님이 왔는데, 창수씨가 영화를 보고나니 가라앉았던 미운 감정이 불쑥 올라오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개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분들의 명예회복이 정말 필요한 것 같아요. 허울뿐인 복권이 아니라, 이분들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하는 명예회복이 필요해요. 그게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죠.

-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묘연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상기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개의 문2’에 대한 계획도 갖고 있나요?

 

이혁상 | 물론 그런 영화적인 욕심은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저희가 해야할 일인가 싶어요. 최근 정부가 검찰과 경찰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참사에 대한 재조사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처럼, 이제는 현실에서 사회적 주체들이 다양하게 참여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저는 이렇게 말하지만, 김일란 감독의 생각은 또 다르겠죠.

 

김일란 | 사실 저도 제 마음을 잘모르겠어요. ‘두 개의 문’을 끝낼 때도 제가 다음 이야기를 할 거란 생각을 못했고, 그때 인터뷰에서도 안한다고 했었어요. 그러니 지금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검찰과 경찰 개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과거 참사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발견되면 또 할 수도 있겠죠. 열린 결말이기는 한데, 일단 저는 지금의 경험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이혁상 | 사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왔다고 해서 이와 유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금 정부가)물론 잘하고 계시지만, 용산 참사 같은 국가의 횡포는 어느 정권에서나 있어왔으니까요. 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요. 김일란 감독은 용산참사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참사가 벌어지는 경우 그래서 카메라가 개입해 사회적인 발언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라면 또 할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죠.

사진 | 윤인경 허프포스트코리아 비디오 에디터

인터뷰 녹취 | 이관우 대학생 인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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