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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루이의 술집 방랑기'

그 술집엔 그런 게 가득했다. 존재감 있는 술집 주인, 술맛 나게 하는 얼굴들, 약속하지 않아도 거기 가면 볼 것 같은 단골, 적당한 점도의 농담과 적당한 정도의 무작위적 어울림... 맞다. 그런 게 있어야 술집일 거다.

  • 임범
  • 입력 2018.01.16 06:53

술맛 나게 하는 얼굴들이 있다. 술 잘 먹는 친구와 식당에서 점심 먹다가 우연히 술 잘 먹는 기자 선배를 만나 서로 인사시켜준 일이 있다. 선배가 가고 난 뒤 친구가 그를 두고 '술맛 나는 얼굴'이라고 했다. 그 선배와 친구 둘 다, 낯선 이도 자기들끼리는 정체를 알아채는 뱀파이어처럼 보였다. 나와 친한 사람 중에 그런 얼굴의 주인이 있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해질녘에 보면 눈, 코, 입에서 누룩 냄새가 난다. 술꾼임을 나타내는, 술꾼끼리 더 잘 알아채는 어떤 신호, 징표, 표지 같은 것이 있긴 있나 보다.

지난해 말부터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영을 시작한 <요시다 루이의 술집 방랑기>를 보고 있다. '요시다 루이'라는 중년 아저씨가 도쿄 외곽의 술집을 찾아가서 술 마시고 나오면 끝나는 15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요시다 루이는 '주점 시인'이라고 소개되는데, 베레모 쓰고 도쿄 뒷골목을 다니는 모습이 서울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는 중년들과 닮았다. 잘 웃고 술 좋아하게 생긴 것까지도 그렇다. 외양은 조금 고루해 보이지만, 장황하게 말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담백하게 하는 모습이 젊게 다가온다.

한번은 요시다가 40대 초반의 여주인이 직접 안주를 요리해 주는 주점에 갔다. 여주인이 애교 있는 얼굴인데, 그를 비추며 '엄청난 술고래'라는 멘트가 나온다. 'ㄷ'자 형의 카운터 가득 여자 서너명을 포함해 10여명의 손님이 둘러앉았다. 그날 구한 식재료로 그날 안주를 만든다는데, 이런 프로그램에서 공들여 찍은 그 안주가 맛있어 보이는 건 당연하고, 이 안주엔 이 술, 저 안주엔 저 술 하며 한잔씩 마실 때 술 당기는 것도 당연하고.... 소주와 청주의 종류가 지방마다 많고 다양한 일본이 새삼 부러워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에 끌린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술집 여기저기서 단골들이 한마디씩 하는 게 들린다. 카운터 한구석의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의 등지느러미가 없다. 요시다가 묻는다. "얘 지느러미 어디 갔어요?" 저쪽에서 한 단골이 취기 어린 소리로 말한다. "여주인이 잘라서 태워가지고 술에 담가 마셨지요."(일본에선 생선 지느러미, '히레'를 태워 청주에 담근 '히레사케'를 마신다.) 다른 손님들도, 여주인도 웃는다. 그런 실없는 농담! 내가 이 프로그램에 꽂힌 이유가 바로 그거다. 술꾼의 신호.

그 술집엔 그런 게 가득했다. 존재감 있는 술집 주인, 술맛 나게 하는 얼굴들, 약속하지 않아도 거기 가면 볼 것 같은 단골, 적당한 점도의 농담과 적당한 정도의 무작위적 어울림.... 맞다. 그런 게 있어야 술집일 거다. 그런 술집은 단순히 술이라는 상품을 팔고 소비하는 장소를 벗어난 하나의 문화일 텐데.... 이 프로그램의 술집들을 보고 있으면 흥겨움과 스산함이 동시에 다가온다. 익숙한 저 분위기들이 이미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것 같다. 한국에도, 서울에도 저런 술집 많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어느 술집을 가든 술꾼의 신호, 혹은 사람에게서 풍기는 누룩 냄새를 잘 잡아챈다. 술집 찾아가면서 요시다가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도쿄에서 끈질기게 옛날 분위기의 술집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술집의 역사나 주인 가족의 사연을 길게 소개하지 않는다. 거기서 스토리를 뽑아내려는 의도가 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면서 스토리 만들기에 급급한 여느 프로그램과 다르다. '옛날 분위기'의 술집을 찾아가서 회상 조에 빠지지 않고, 그곳을 즐기는 사람들을 현재형으로 보여준다. 경쾌하면서도 짠한 게 그런 태도 때문일 거다.

*이 글은 한겨레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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