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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긍정하는 삶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투적 삶으로 스스로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지속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모든 걸 획일적 잣대로 서열화하는 비극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포기하지마, 1%의 가능성만 있다면>, <꿈꾸는 자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마! 넌 최고가 될 거야>, <포기하는자 머슴으로 살고 도전하는자 주인으로 산다>, <포기하지마라 포기하지마라 절대로 포기하지마라>.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책 제목들이다. 어디 책뿐인가. 영화와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는 물론 언론도 포기하지 말라며 사실상 포기를 비판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중문화와 언론의 주요 양식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성공의 주인공들이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모두 다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건 바로 '생존 편향'이다. 생존 편향은 생존에 실패한 사람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시성 결여로 인해 비교적 가시성이 두드러지는 생존자들의 사례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편향을 말한다. 실패 사례는 기록이 없거나 빈약한 반면, 성공 사례는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본의 아니게 성공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언론이 '성공 미담' 위주의 기사를 양산해내는 데엔 기사의 흥미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실패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 탓도 있다. 실패를 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자신이 나서서 "왜 나는 실패를 했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기사들도 나오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것일 뿐 성공보다 훨씬 많은 실패 사례들은 언론의 취재와 보도에서 사장되기 마련이다.

물론 포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포기를 비판하는 메시지엔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는 방어적 메시지와 꿈과 야망을 위해 싸우라는 공세적 메시지라는 두 종류가 있다. 예컨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방어적 메시지이지만, 야망의 실현을 위해 포기하지 말하고 말하는 건 공세적 메시지다.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해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포기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포기해선 안 될 것이 있는가 하면 포기가 바람직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선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포기는 무조건 어리석거나 나쁘다"는 식의 포기 부정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하면 된다"는 슬로건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 왔으며, 고성장이 그런 슬로건의 타당성을 꽤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시절에 형성된 포기 부정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고성장 시대의 종언은 우리에게 꿈의 높이를 낮추거나 욕망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삶의 지혜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런 포기 긍정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 긍정론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공론장에선 포기 긍정론이 잘 유통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포기를 긍정하면 '루저'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런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이 포기 긍정론을 역설하면 욕먹기에 십상이어서 감히 입을 열기 어렵기 때문이다.

포기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그건 어차피 시장 논리에 따라 결정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는 전형적인 타인지향적 사회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투적 삶으로 스스로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지속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모든 걸 획일적 잣대로 서열화하는 비극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체제하에서 포기란 가능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서열사회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젠 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포기를 긍정하는 삶이 뿌리를 내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언론부터 포기 부정론 일변도의 기사 생산 방식을 의심해보는 게 좋겠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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