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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릴 권리'에 대해 말하는 영화 '피의 연대기' 감독을 만났다

“이 피가 내 피다, 나 지금 생리한다. 왜 말을 못하냐구!!!”(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패러디)

그렇다. 우리는 그간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달거리, 마법, 그날, 홍양, 대자연’이라 돌려 말했던 그 이름 ‘생리’를 소리쳐 부르며 “더 자유롭게 피 흘릴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발칙한 영화가 등장했다. 오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피의 연대기>는 한 마디로 ‘생리 위키피디아’, ‘생리 도감’이라 칭할 만한 영화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김보람(31) 감독을 마포구 상수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보람 감독

영화의 시작은 네덜란드 친구 샬롯이었다. “전 생리대 외에는 써 본 적이 없는데, 샬롯은 초경 때부터 탐폰을 썼대요. 한국에선 ‘질 속에 무언가를 넣는 것은 께름칙하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네덜란드에선 ‘축축하고 불편한 생리대를 어떻게 차고 다니냐’고 하는 거죠. 똑같이 한 달에 한 번 피를 흘리는데, 왜 그 방법이 문화권마다 다를까? 이 단순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어요.” 검색하다 보니 마침 전 세계에서는 생리를 둘러싼 각종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NPR), 코스모폴리탄 등은 2015년을 ‘생리의 해’로 규정했다. 김 감독은 “아, 이참에 전 세계적으로 ‘커밍아웃’을 시작한 생리 이야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다큐 '피의 연대기'

영화는 발랄·유쾌·상쾌하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등장해 자신의 ‘생리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 이를테면 감독의 할머니가 “목화와 무명베로 생리대를 만들어 썼다”고 회상하는 식이다. 생리를 둘러싼 역사에 관한 다채로운 지식도 들려준다. 이집트 여성은 파피루스, 로마 여성은 양털, 하와이 원주민 여성은 양치식물로 탐폰을 대신했다. 역사와 종교와 지역에 따라 생리에 대처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더럽고, 불경하고, 타락한 것을 상징하며 금기시하는 것만은 같았다.

듣고 보니 딱딱하고 어려울 것 같다고? 천만에! 어떤 극영화보다 유익하고 흥미롭다. 감독은 이해와 재미를 돕기 위해 영화 중간중간 애니메이션을 삽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엇보다 생리가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썼어요. 애니메이티드 다큐의 형식을 취했고 편집도 속도감이 있어 절대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하.”

영화는 역사학자, 여성학자, 산부인과 의사를 비롯해 생리를 경험한 여성들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일반인은 100명에게 인터뷰를 시도하면, 10명 성공하는 정도? 처음 섭외된 30대 기혼여성 2명이 인터뷰하고 나서 ‘결혼한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아, 미혼여성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터부시돼 왔나 깨달았어요.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자신이 생리 때문에 겪은 경험이나 고통을 폭탄 카톡으로 보내는 여성이 많았어요. 역설적이지만, 그게 영화를 포기하지 않은 힘이 됐어요. 꼭 필요한 영화라는 확신.” 영화 속에는 감독의 할머니, 엄마, 이모들도 총출동한다. “아주 가깝고 편한 사람들과만 나누는 ‘밀담’이라 여기는 탓에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한꺼번에 섭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단다.

수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감독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질에 손을 넣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는 거죠. 탐폰이나 생리컵을 사용하려면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감독은 스스로 생리컵 체험에도 나선다. 이 과정은 고스란히 영화 속에 담겼다. 액션캠을 머리에 달고 붉은 생리혈이 가득 담긴 생리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다. “영화에서 생리혈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사실 생리혈 처리는 일상적인 것이고, 혼자 하는 것이잖아요? 머리에 액션캠을 달고 찍는 건 제작진 모두가 반대했는데, 제가 고집했어요. 모든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자 남성도 좀 알았으면 하는 장면이라서요.” 그는 이후 생리컵에 안착해 2년째 생리대를 쓰지 않는다. 또 “피 흘릴 방법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됐단다. “생리컵을 사용하면서 저도 처음으로 제 몸을 더 탐구하게 되고, 알게 됐어요. 작은 가슴이 콤플렉스였는데, 어느 순간 이것조차 나의 특색, 매력으로 여겨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한층 성장한 느낌이었어요.”

영화는 생리대 공공재화 문제로까지 시선을 확장한다. 한국에서도 이 문제는 저소득층 여성의 ‘깔창 생리대’ 보도로 인해 주목받은 바 있다. 2016년 생리대 공공재화를 선언한 뉴욕시의 사례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김 감독은 뉴욕시장이 공립학교·교도소 등에 생리용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생리대 공공재화 법안’에 서명하는 날, 운 좋게 현장을 촬영할 수 있었다. “생리를 이제 권리의 관점에서 볼 때가 된 것 같아요.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평생 400회 생리를 해요. 국가가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김 감독은 이 영화가 생리 문제에 관한 ‘인트로’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특히, 청소년 교육용으로 쓰이면 좋겠다”고 했다. 감독 말마따나 이 영화는 ‘시작, 도입’에 불과하다. 생리에 대해 더 신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자고, 좀 더 편하게 피 흘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니 자유롭게 선택하자고 영화는 말한다. 김보람 감독은 벌써부터 “이 발칙한 영화가 고전이 되는 그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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