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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그토록 뜨거웠던 순간

1987년에 촉발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다양한 이들의 얼굴을 나열하고 그들의 내면 속에 켜켜이 쌓여가는 열망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다 끝내 다다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결말부에선 '1987'이 1987년이라는 시대 자체를 캐릭터처럼 제시하는 영화임을 확인하게 된다.

  • 민용준
  • 입력 2018.01.05 09:42
  • 수정 2018.01.05 10:06

'1987'은 2017년의 신호탄이 된 역사를 목격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1987년 1월 14일, 한 청년이 죽었다. 이름은 박종철, 서울대 학생이었던 그는 당시 수배 중이었던 서울대 선배의 행방을 추적하던 공안 경찰들로부터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됐고,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 했지만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 면에 실린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학생 쇼크사를 해명하기 위해 기자들을 불러놓은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이 사망 당일 오전에 밥과 콩나물국을 먹었고, 입맛이 없어서 냉수를 마셨다고 했다. 그런 다음 심문을 시작했는데,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망언은 그렇게 탄생했다. 실언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몰염치와 부조리가 팽배했던 무리의 민낯이 시대를 향해 격발된 것이었다.

'1987'은 바로 그 몰염치와 부조리가 지배하던 시대를 걷어내고자 각기 다른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던 어떤 이들에 관한 영화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측근의 군부 세력들은 장기 독재의 야욕을 품었지만 1987년 6월 10일에 시작해 20여 일간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국민이 전국적으로 벌인 시위로 인해 결국 그 욕망을 거둔다. 우리가 아는 '6월 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대단히 뜨거운 역사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미는 만큼 애초에 발화점이 대단히 높은 영화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결국 '실제 역사의 뜨거움을 충실히 보존하고 잘 감당하는 동시에 객석까지 제대로 전달해낼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표를 쥐고 잉태된 영화인 것이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해를 담고 싶었다. 1987년 사람들의 온기와 양심이 담긴 이야기가 나에게도 많은 힘과 용기가 됐다. 그런 점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가 모두 주인공이 되고, 나아가 전 국민이 주인공이 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1987'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연출의 변을 밝혔다. '1987'의 제작이 확정된 건 2016년 12월이었다. 박근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는 상황이었고, 이듬해에는 분명 큰 변화가 예측되는 시점이었다. 물론 1987년과 2017년의 사회는 엄연히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지만 30년을 사이에 둔 두 시대의 열망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져 보이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017년에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1987'이 정서적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영화일 것이란 예감을 부추기고도 남을 풍경이었다.

'1987'은 1987년 1월 14일에 시작해 1987년 6월 10일에 종결된다. 1987년 1월 14일은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치사로 사망한 날이다. 1987년 6월 10일은 이한열이 연세대 앞에서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다음 날, 즉 6월 항쟁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관객을 6월 항쟁의 입구까지 인도할 뿐 관통하지 않는다. 6월 항쟁이라는 불가마 같은 역사 한복판에 관객을 몰아넣고 감상을 삶아버리려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6월 항쟁이라는 역사를 점화하고자 스스로 불씨가 되려 했던 수많은 사람의 안간힘을 수집하고 목격하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딛고 선 오늘의 역사가 시대를 밀어 올리고자 했던 평범한 이들의 분투와 분루를 딛고 올라선 것임을 체감하게 만든다.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시작된다. 임진각에서 제복을 입은 채 북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사내의 비장한 표정과 어디론가 달려가는 구급차 안의 강압적인 공기가 교차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1987'이 품은 양면적인 시대성을 온전히 대변한다. 급진 좌경하는 불온 세력을 소탕하겠다는 이북 출신 대공수사처장 박 처장(김윤석)에게 현 정권에 반동하는 이들은 한낱 빨갱이에 불과하다. 그는 장기 독재를 꿈꾸는 전두환과 그 일당의 입장에서 쓸모 있는 인재이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준다. 그 반대편에는 고문치사를 당한 청년 박종철이 있다. 현 정권에 반하는 젊은 청년은 독재 권력을 이어가려는 정권의 입장에서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로 분류되는 동시에 손쉽게 끌어와 망쳐버려도 되는 약자일 뿐이다. '1987'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교차되는 두 상황은 결국 권력을 비호하는 신념과 권력에 저항하는 신념이 처한 운명의 대비를 명징하게 보여줌으로써 2017년과 1987년의 공기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명확하게 설득해낸다.

'1987'은 이미 '무엇을'이 준비되었던 영화다. 그러니 또한 '어떻게'에 답하는 것이 중요한 영화다. 영화가 선택한 건 시대를 대변하는 다양한 얼굴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영화는 다양한 인물을 징검다리처럼 밟아나가며 수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시대적 격정의 징후를 하나씩 수집해나간다. 부검을 생략하고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하려는 대공수사처에 부검 명령을 내리고 이를 관철시킨 검사 최환(하정우), 외압에도 불구하고 박종철의 고문 흔적을 증언한 중앙대 부속병원 내과의사 오연상과 박종철의 사인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힌 부검의 황적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끈질기게 취재하는 일간지 사회부 기자 윤상삼(이희준)과 해직 기자 출신의 옥중 재야인사 이부영(김의성), 이부영에게 박종철 고문치사에 가담한 이들의 실체를 알린 보안계장 안유(최광일)와 이부영의 비밀 서신을 은신 중인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하는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그리고 6월 항쟁의 발화점이 되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강동원) 등 저마다의 자리에서 작은 파랑을 만들어 끝내 거대한 격랑을 일으킨 얼굴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다양한 인물의 등장과 퇴장을 통해 129분의 러닝타임은 빠르게 휘몰아치듯 진전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설정은 영화적 상황에 맞게 조금씩 각색됐고 일부 인물은 완전히 변형되기도 했지만, 시대를 바꾸고 싶었던 이들의 결정적 역할은 실제 역사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고문치사를 당한 대학생의 부검을 명령한 검사, 고문 흔적을 증언한 의사, 고문에 의한 사망 소견을 밝힌 부검의, 고문치사의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 고문치사에 대한 진실을 알린 교도관, 고문치사로 죽은 동시대 청년의 억울함과 시대의 변화를 촉구하며 시위를 하다 죽은 대학생.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모든 캐릭터는 1987년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역사로부터 빌려와 재현한 것이다. '1987'은 그 인물들의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 조립해냄으로써 개개인의 크고 작은 선택이 거대한 진보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됐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토록 평범한 얼굴들이 길어 올린 비범한 역사를 뒤늦게 마주하고 맞잡을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끝내 진귀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정보량이 많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어지럽게 느껴지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말부에 다다르면 저마다의 감상으로 옮겨 붙은 불을 끌어안고 함께 점화해 타오르고 싶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역사를 평탄하게 닦아내고자 안간힘을 썼던 수많은 얼굴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섰던 수많은 사람의 얼굴처럼 평범해서 보다 숭고하고 절박하다.

어떤 면에선 '1987' 속의 평범한 얼굴들을 대변하기 위해 참여한 수많은 배우의 이름만 봐도 기적 같다.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악인의 인상을 담아낸 김윤석의 공헌도가 월등해 보인다. 김윤석은 독재 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의 멱살을 잡고 있던 인물의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설득함으로써 1987년의 공기를 온전히 재현한다. 불합리하고 폭압적인 시대상을 온전히 설득해내는 캐릭터를 확보함으로써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보통 사람들의 크고 작은 노력이 그만큼 간절하고 힘겨운 싸움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캐릭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에 만연한 공포와 갈망을 실감할 수 있다. '1987'이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듯 시작되는 것도 결국 그 시대를 대변하는 캐릭터의 존재감이 마련된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얼굴을 대변해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핸드헬드 촬영과 클로즈업 쇼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끓어오르는 시대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는 것도 영화적 의도에 부합하는 탁월함으로 느껴진다. 결국 1987년에 촉발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다양한 이들의 얼굴을 나열하고 그들의 내면 속에 켜켜이 쌓여가는 열망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다 끝내 다다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결말부에선 '1987'이 1987년이라는 시대 자체를 캐릭터처럼 제시하는 영화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마 '1987'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건 주요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허구적으로 창작된 연희(김태리)일 것이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둘 중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시대의 변화에 가담하거나 시대의 변화를 막아서거나. 그런데 연희는 시대의 변화를 막아서는 쪽을 경멸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가담하려는 쪽도 회의하는 인물이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는데?"라고 반문하는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7'은 어쩌면 2017년의 연희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영화일 수도 있다. 알다시피 1987년 이후 세상은 변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부침은 있었지만 1987년은 분명 이 땅의 민주주의가 새롭게 진화하는 유전자를 얻게 된 해였다. 어쩌면 그건 영화에도 등장하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숭고함을 계승하며 새로운 시대를 기대한 어떤 이들의 이른 노력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17년에 광장에 모여 촛불을 켜고 민주주의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1987년 6월 항쟁 당시 같은 자리에 모여 노래한 이들로부터 일찍이 마련된 유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987'의 결말부에서 연희가 바라본 풍경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2017년의 우리가 모았던 뜨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이어지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록 영상은 이 영화의 뜨거움이 우리가 지나온 어떤 역사 위에서 지핀 것임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함으로써 거대한 역사를 이룬 우리의 내일을 다시금 다짐하게 만든다. 문득 잊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시대와 역사와 얼굴을 한 번 더 각인시킨다. 역사의 온도는 그렇게 보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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