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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신주쿠에서 44명이 화재로 죽었다

불과 연기를 막는 방화문을 우연히 열고 화재를 알아챈 종업원 3명은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건물에서 뛰어나갔다. 이 때 열린 방화문이 엄청난 피해를 만들어냈다. 불로 인한 연기가 그대로 4층 섹시바로 들어가 버렸다.

  • 윤재언
  • 입력 2018.01.04 10:49
  • 수정 2018.01.04 10:53

화재(火災)에 다른 사고와 달리 '재앙 재'자가 붙는 데는 그만큼 피해가 삽시간에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차적으로는 불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만, 연기와 열로 순식간에 인명 재산피해가 발생한다. 이번 제천 화재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서도 화재는 큰 골칫거리다. 지진이 빈발하기 때문에 목조 주택이나 건물이 많아 불이 한 번 번지면 손 쓸 방도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22일 10시쯤 니가타 이토이가와(新潟糸魚川)시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표적이다. 한 라멘집에서 가스를 끄지 않은 것이 원인이 돼 큰 불이 났다. 불은 바람을 만나서 끊임없이 번져갔다. 화재가 오전 중 발생해 다행히 인적 피해는 부상자 17명에 그쳤고, 대부분은 경상이었다.

하지만 건물 피해가 엄청났다. 주택을 포함한 건물 120동이 화재로 사라졌다. 전체 소실된 면적은 4만 제곱미터에 달했다. 그야말로 잿더미가 된 것이다.

제천 참사가 있기 직전, 12월 24일 사이타마현 오미야(大宮)에서 난 불은 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프란도(ソープランド, soap land)라고 하는 형태의 풍속업소(=즉 성매매업소)에서 불이 나 손님 2명, 여성 종업원 3명이 숨졌다. 원인은 질식사였다. 불 난 곳의 특성상 유족이나 관계자가 대놓고 언론에 나오기는 힘들었다.

현재까지 원인은 건물 내 쓰레기통에 버려진 담배꽁초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난해 6월 해당 업소는 소방당국으로부터 "출입구에 물건을 두지 말라"는 지도를 받고 조치를 했으나, 아마도 이게 그 뒤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보도도 나왔다.

건물 자체도 지어진 지 무려 50년이 됐다. 그렇기에 지어질 당시의 약한 규제가 그대로 이어져 현재의 강한 규제와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고 한다. 풍속업소 특징인 좁은 복도와 여러 곳으로 나뉘어진 방도 피해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추정도 나온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건 2001년 신주쿠 카부키초(新宿歌舞伎町)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와 참사에 대해서다.

신주쿠, 그 중에서도 카부키초라고 하면 한국의 종로나 명동 등지에 비견할 만한 번화가다. 늘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다. 일본에서는 '아시아 제일'의 번화가로도 불린다.

이 블로거는 카부키초의 최근 사진을 올려뒀다. 삐끼도 많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도 많다. 카부키초에서 조금만 더 가면 이른바 '코리아 타운'인 신오쿠보가 나온다. 카부키초 경계선에는 한국 술집이나 바 등 한국어 간판을 내건 가게도 적지 않게 있다.

사진작가 권철이 쓰고 찍은 '가부키초'라는 책도 있다. 90~2000년대 카부키초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늘 뭔가 다툼이 있고, 술취해서 종잡을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곳이 바로 카부키초다. 일본 여성들은 위험한 곳으로 꼽으며 되도록 가지 않으려 하는 곳이기도 하다.

'술집 바가지' 문제도 심각해지면서 아예 경찰이 지역 내 스피커로 4개국어(일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써가며 "삐끼를 따라가지 마세요"라고 부르짖는다. 실제 수백만원이 뜯긴 사례도 있다고 하니 한국 여행객도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런 카부키초에서 2001년 9월 1일 화재가 발생했다. 동네 중심에 위치한 '명성56(明星)'이라는 빌딩이 화재 장소로, 일본답게 폭이 좁고 길다란 4층짜리(지하2층) 건물이었다.

건물에 입주한 곳은 카지노(아마도 불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속업소(코스프레 여성이 등장하는 곳), 마작점, 섹시바 같은 가게들이었다. 카부키초답다고 해야할지... 합법이면서도 뒷세계에 존재할법한 모든 것이 한 건물에 모여있던 셈이다(하지만 결국 불법적인 업소도 있던 것으로 후에 드러났다).

(불이 난곳은 3층 마작점 곁 엘리베이터 부근으로 판명됐다)

불과 연기를 막는 방화문을 우연히 열고 화재를 알아챈 종업원 3명은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건물에서 뛰어나갔다고 한다. 그 뒤 일단 신고는 했으나, 문제는 열린 방화문이 엄청난 피해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불로 인한 연기가 그대로 4층 섹시바로 들어가 버렸다.

4층 종업원 여성도 소방서에 신고했지만 손쓸 길이 없었다. 여기에 다시 한번 희생자를 양산하게 되는 우연(?)이 겹쳤다. 평소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용자들이 계단을 쓸 일은 없었다. 온갖 물건들이 계단에 쌓여있었다.

게다가, 설치된 자동화재탐지기도 오작동이 많았다는 이유로 애초 전원이 꺼져있었다. 4층 천장에 부착돼있던 것은 내장재가 기기를 덮고 있어 무용지물이었다. 피난용 기구도 사실상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제천 화재와 유사하게 피해를 확산할 수밖에 없는 각종 비극적 우연이 겹쳐있었다.

당시 한 종업원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숨진 건, 대부분이 단골손님과 일하던 여자애들, 그리고 서빙 스탭. 그날 이후, 화재에서 살아난 스탭과는 연락하지 않아요.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시부터 가게에 피난경로 같은 건 없었어요. 맥주병 박스가 놓여있거나, 스탭 탈의실이 돼있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피할 수 있는 장소는 확실히 아녔습니다.

건물 외관에는 별다른 화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유독 가스에서 발생한 연기는 삽시간에 건물로 확산됐다. 4층 섹시바에서 무려 27명이 한꺼번에 숨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님들을 놔두고 도망갔던 마작점에서도 17명이 숨졌다. 도쿄 한복판에서 무려 44명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출동했던 소방관은 겉모습만 보고 "저 정도라면 금방 끝나겠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들어가본 광경은 전혀 달랐다. 탈출용 계단은 쇠가 녹을 정도였고, 바닥의 타일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3층 주방내 배기구 주변에는 도망가려던 사람들이 겹겹이 쌓인 채 숨져있었다.

4층은 계단 이곳저곳에 물건이 놓져여 있었다. 실내엔 창문도 없었다. 피난로 확보 같은 대책이 세워져있었다면 살 사람은 훨씬 더 많았다고, 당시 소방관은 회상한다.

후에 진상이 밝혀진 바로는 4층에서 숨진 3명은, 금융지식이 부족한 노인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외환금융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숨진 이들에게 '벌이 내렸다'는 보도를 한 주간지도 있어 논란이 됐다고. 마작 가게 고객들도 노인이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화재 원인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3층 엘리베이터 부근 가스관이 이상한 형태로 돼 있다는 점을 경찰이 확인해, '방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됐지만,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CCTV도 없었고, 건물 자체 특성상 수상한 인물도 빈번히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서는 이듬해 소방법이 대폭 개정됐다.

건물 주인과 관리자에게 더 중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했다. 자동화재탐지기 설치 대상 건물을 늘리고, 만약 소방서 점검 이행을 하지 않으면 형사고발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위반자에 대해서도 '징역 1년, 벌금 50만엔 이하'에서 '징역 3년, 벌금 300만엔 이하'로 높여잡았다. 연 1회 소방 점검과 보고 의무도 명시됐다.

이 사건 관련 건물주 등 5명은 집행유예 판결로 종료됐다. 다만 민사적 책임이 인정돼 수십억원을 유족 등에게 보상해야 했다. 죄를 강하게 추궁하지 못한 건 아마도 방화 가능성 때문으로 생각된다. 화재 뒤, 건물에 소유권과 관련한 분쟁이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래는 판결 관련 뉴스 영상이다.

지난해 방송된 뉴스에서는 15년간 방문해온 유족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화재 영상도 볼 수 있다.

2015년 10월 히로시마 빌딩 화재에서도 6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일이 있었는데, 후에 피난유도훈련이 실시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좁다란 건물이 모여있는 신주쿠 골든가이에서도 같은 해 큰 화재가 났다. 지난해엔 카부키초 러브호텔에서 화재가 났고, 올해 츠키지 시장에서도 화재가 나 7곳이 전소됐다.

필자는 2016년 지진 체험 교육과 함께 화재 피난 훈련을 받았다. 화재가 난 상황을 가정하고 연기속에서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훈련이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옷으로 입을 가린 채 절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향하라!' 이게 당시 교훈이었다(계단에 물건이 놓여있다면 소용이 없겠지만...).

화재 발생 자체는 완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정기적, 그리고 좀더 실질적인 화재 훈련을 생각해볼 만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소방당국을 우선은 믿어야겠지만, 몸에 밴 피난 대피 훈련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리라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건물 내 종사자나 공사 인부에 대한 철저한 교육은 불가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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