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곧 20년 대통령' 푸틴의 정적들 의문사 미스터리 총정리

  • 김성환
  • 입력 2018.01.03 10:29
  • 수정 2018.01.03 10:38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attends his New Year address to Russians in central Moscow on December 31, 2017. / AFP PHOTO / Alexey NIKOLSKY        (Photo credit should read ALEXEY NIKOLSKY/AFP/Getty Images)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attends his New Year address to Russians in central Moscow on December 31, 2017. / AFP PHOTO / Alexey NIKOLSKY (Photo credit should read ALEXEY NIKOLSKY/AFP/Getty Images) ⓒALEXEY NIKOLSKY via Getty Images

러시아 야권의 유일한 희망 알렉세이 나발니가 러시아의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오는 3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을 거부당했다. 나발니는 장외에서 반 푸틴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나발니와 같은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의 수난사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한겨레>가 그 역사를 총정리해봤다.

■ 유일한 대항마 알렉세이 나발니의 현재 상황

현재 상황은 이렇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7년 12월 25일 ‘반푸틴 시위’의 상징 알렉세이 나발니(41)의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을 거부했다. 〈뉴욕타임스〉의 설명을 보면, 나발니는 ‘열광적 지지자를 거느린 유일한 푸틴의 대항마’다. 러시아 선관위는 지난해 2월 나발니가 징역 5년과 집행유예 5년을 받은 사건을 두고 “나발니의 범죄는 피선거권을 2028년까지 제한하는 중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법원이 당시 ’중죄’라고 지목한 사건이 발생한 건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발니는 2009년 키로프 주지사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주 정부 산하의 목재회사 ‘키로블레스’(Кировлес)의 하청계약에 관여했다. 러시아 검찰은 당시 나발니가 키로블레스가 지나치게 싼 가격에 목재를 팔도록 하고, 하청업체가 비싼 가격에 이를 되팔도록 조종해 키로프 주에 큰 소해를 끼쳤다며 기소했다. 2013년 나발니는 키로프 주 레닌스키 법원에서 목재 1600만 루블(당시 약 5억6000만원) 어치를 빼돌려 유용한 혐의로 5년 징역형에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당시 이 재판은 하청 업체와 나발니의 관계를 입증하지 못했고, ‘상식에서 벗어난’ 정도의 이윤을 챙긴 증거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6년 유럽인권재판소 역시 ‘나발니가 부당하게 재판을 받았다’고 지적하며 러시아 정부가 나발니에게 5만6000유로(약 7100만 원)를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러시아 대법원은 이후 지방법원으로 이 사건을 되돌려 보냈고, 2017년 2월에야 다시 판결이 났다.

하지만 재심 결과는 이전과 판결문까지 똑같았다. 징역 5년에 집행유예 5년. 최근 지지율이 80%를 넘나드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오는 3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극히 작다. 그럼에도 나발니의 유죄 판결과 후보 등록 거부를 두고 지지자들은 ‘푸틴 정부의 정적 탄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푸틴 지지자들은 ‘반부패 변호사의 부패 사건’이라 반박하고 있지만, 영미권 외신은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과거 푸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정적들이 수난을 당해온 역사 때문이다.

■ 보리스 넴초프의 죽음

푸틴에게 수난을 당한 인물 가운데 나발니와 함께 연합 시위를 벌였던 유력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의 죽음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때 부총리를 지낸 넴초프는 2015년 2월 27일 밤 11시 40분께 연인과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모스크바 크렘린궁이 보이는 한 다리 위에서 차를 탄 괴한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6발 가운데 4발이 넴초프의 몸에 맞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옐친의 후계자’로 거론됐던 넴초프는 2011년부터 나발니와 함께 선거 부정, 푸틴의 장기 집권 시도 등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넴초프가 죽을 당시에도 두 사람은 시위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나발니는 지하철에서 전단을 나눠줬다는 혐의로 15일 형을 받아 감옥에 있었다.

〈가디언〉의 설명을 보면, 나발니가 나눠 준 전단은 넴초프 사망 다음 주인 3월 1일 넴초프와 함께 주도하기로 한 반정부 시위를 알리기 위한 광고지였다. 법원은 넴초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나발니의 요구를 거부했다. 나발니는 15일간의 형을 마친 뒤에야 넴초프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넴초프 총격 살인 사건을 수사한 연방수사위원회는 넴초프가 강력한 푸틴의 정적이라는 이유로 푸틴에 대한 비난 여론을 만들기 위해 제3의 세력이 넴초프를 살해했을 가능성 등을 제기했다. 다분히 푸틴 옹호적인 의혹 제기였다. 반면 나발니를 비롯한 야권은 크렘린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전직 체첸군 장교인 자우르 다다예프를 포함한 5명이 넴초프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 넴초프가 예언했던 베레좁스키의 추방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죽음 역시 흑막에 가려있다. 베레좁스키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던 무렵 국유자산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이런 러시아의 신흥재벌을 일컫는 ‘올리가르히’(oligarch)의 대표로 불려왔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정계와 재계를 주무르며 1990년대 러시아의 ‘실세’로 불렸다.

베레좁스키는 1990년대 말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국장을 지낸 푸틴을 총리로 밀어주고 자신의 소유였던 당시 러시아의 3대 관영 방송인 ORT TV를 활용해 푸틴이 대통령이 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푸틴은 정권을 잡자마자 칼날의 방향을 돌려 베레좁스키와 같은 ‘올리가르히 축출’ 운동을 벌였다.

〈뉴요커〉의 보도를 보면, 당시 넴초프는 베레좁스키에게 “푸틴은 자신을 약하게 보고 지지해준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넴초프의 경고대로 푸틴이 대통령이 된 뒤 베레좁스키는 돈세탁 혐의와 세무조사의 탈을 쓴 ‘올리가르히 축출’ 혹은 ‘옐친 패밀리 척결’의 흐름에 밀려 거의 모든 자산을 헐값에 넘기고 살아남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베레좁스키는 국외에서 푸틴 정권과 싸움을 벌였다. 〈뉴요커〉의 설명을 보면, 러시아는 망명한 그를 ‘최고의 적’으로 간주하고 돈 세탁부터 금융 사기까지 모든 것을 파헤치며 본국으로 송환할 방법을 찾았다. 베레좁스키는 이런 러시아 정부와 각을 세우며, 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1999년 아파트 폭탄 테러’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막판에는 푸틴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레좁스키는 망명한 지 약 13년이 지난 2013년 3월 자신의 집 욕실에서 스카프로 샤워 커튼 봉에 목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의 증거는 없었으나 영국의 검시관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망 당시 베레좁스키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 푸틴을 향한 음모론 : ‘1999년 아파트 폭탄 사건’

푸틴을 향한 가장 끔찍한 의혹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1999년 아파트 폭탄 테러’를 배후에서 지시했거나 혹은 테러 지시에 따른 간접 혜택을 입었다는 설이다. 간접적으로 혜택을 입었다는 것은 테러를 지시한 건 옐친 정권이지만 정작 그 수혜는 푸틴이 가져갔다는 얘기다.

1999년 가을 모스크바와 볼고돈스크 등 러시아 쇼핑센터와 아파트 등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9월 초부터 중순에 걸쳐 여러 차례의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약 300명이 사망했으며 1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9월 22일 모스크바 동남쪽의 도시 랴잔에서 주민신고를 받고 출동한 폭발반이 앞선 테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형태의 폭발물을 발견한다. 〈가디언〉의 설명을 보면, 당시 옐친은 병석에 있었고, 푸틴은 연방보안국 국장에서 이제 막 신임 총리로 올라섰으며, 대통령 선거는 코앞인 상황이었다.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푸틴은 주민들의 경각심을 칭송하며 테러의 책임을 체첸 반군에 돌린다. 푸틴은 당시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폭격해 2차 체첸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데, 이 사건은 푸틴의 인지도를 높여 대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이 폭발물을 설치한 세 명의 남자가 체포되고, 이들이 정작 푸틴이 한때 수장으로 있었던 연방보안국 소속이었음이 밝혀진다. 러시아 당국은 ‘훈련 중’이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 일련의 폭탄 테러 사건에 연방보안국이 관여했으며 푸틴 혹은 옐친 정부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KGB 출신으로 1998년부터 1999년 총리에 지명되기 전까지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 국장을 역임했다.

■ 1999년 아파트 테러사건의 파헤친 사람들

푸틴이 아파트 폭탄 테러의 배후라고 주장한 야당 정치인들과 언론인 중에도 의문을 죽음을 맞은 이들이 있다.

푸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러시아 의회에서는 해당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세르게이 유센코프와 유리 슈체코치킨은 그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러시아 연방보안국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자체 조사위를 꾸려 집요하게 조사를 벌였다.

유센코프는 2003년 2월 자신의 아파트 인근에서 가슴에 총탄 한 발을 맞고 살해당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슈체코치킨은 FBI와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얼마 전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려 쓰러진 뒤 16일 만에 사망했다. 슈체코치킨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비판 언론 <노바야 가제타>>의 탐사보도 기자 출신이었다.

이 죽음만이 아니었다. <노바야 가제타>의 독보적인 목소리였던 안나 폴릿콥스카야가 2006년 10월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 〈워싱턴포스트〉의 설명을 보면, 폴릿콥스카야는 체첸 전쟁의 참상에 대해 주로 보도했으며, 역시 모스크바 아파트 폭탄 사건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체첸 관련한 보도로 수많은 위협을 받아왔다.

당시 〈한겨레21〉의 보도를 보면, 폴릿콥스카야는 죽기 1년 전 영국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상에 산재한 위협에 관해 이야기하며 “의사가 환자한테 건강을 주고,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언론인의 임무는 본대로 현실을 쓰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 법원은 폴릿콥스카야 사망 사건을 ‘청부 살인’으로 결론짓고 다섯 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전 KG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죽음은 무척 유명하다. 그는 2006년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차를 한잔 마신 뒤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추출하는 데 상당한 핵기술이 필요한 희귀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 중독. 당시 한겨레 보도를 보면, 리트비넨코는 KGB가 해체된 뒤 국내 분야를 넘겨받은 연방보안국이 모스크바 아파트 폭파 사건의 배후이며, 베레좁스키 암살을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 정부가 리트비넨코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전 연방보안국 요원 안드레이 루고보이의 신병 인도를 거부한 바 있다. 루고보이는 이후 2007년 러시아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보면, 2015년에는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조국에 대한 헌신’을 기리는 메달을 수상했다.

■ 푸틴을 향한 음모론의 실체는?

1999년 아파트 폭탄 테러와 그 음모론을 둘러싼 의문의 죽음들을 두고 서방에서는 푸틴이 ‘냉혈한 킬러’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2017년 2월 도널드 트럼프의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런 시선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폭스뉴스〉의 호스트 빌리 오라일리는 이날 푸틴에 대한 트럼프의 호감에 대해 의아해하며 “그는 살인자다”라는 말을 던졌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살인자는 얼마든지 있다”며 “우리 중에도 살인자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이라고 결백하다고 생각하나?”라고 대답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은 푸틴 한 명만 ‘살인자’로 상정해 몰아갈 만큼 단순한 사건들이 아니다. 러시아 태생의 저널리스트인 키스 게센은 〈가디언〉에 푸틴이 살인자라는 의혹을 두고 ”엉성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폴릿콥스카야와 넴초프의 죽음 뒤에는 체첸의 독재자 람잔 카디로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넴초프 사건의 경우 체첸군 장교의 개입 등 배후에 카디로프가 있다는 증거가 “압도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카디로프의 관련설이 푸틴의 의혹을 모두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령 체첸 자치공화국의 이슬람 반군 출신 독재자인 카디로프는 ‘푸틴의 개’로 불리며 체첸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을 사냥해왔기 때문이다. 카디로프는 넴초프 살인 사건과 자신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으나 이를 순수하게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99년 아파트 사건 역시 푸틴이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렇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정권 말기에 거대한 부패 혐의가 드러나 퇴임 뒤 두 딸과 함께 감옥에 갈 신세였다. 베레좁스키 등의 올리가르히들과 옐친 주변의 부패한 인사들은 정권 교체 뒤에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안전망’이 필요했는데, 그 안전망으로 선택한 후계자가 바로 푸틴이다. 그러나 푸틴에겐 명성이 필요했다.

1999년 8월 옐친이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을 때 푸틴은 대중에겐 생면 부지의 인물이어서 코 앞에 닥친 선거에서 푸틴을 당선시키려면 유명세를 띄워 줄 ‘특급 작전’이 필요했다. 결과론적 시각에서 이 작전의 목적과 시기에 딱 들어맞는 사건이 ‘모스크바 아파트 폭파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의혹의 요체다. 아파트 폭파 사건이 직후 푸틴은 사건 현장을 돌아보는 모습을 중계해 얼굴을 알리고, 체첸을 배후로 지목해 공격에 앞장서며 폭풍 같은 인기를 얻었다.

의심스런 정황도 많았다. 테러 공격 직후인 9월 22일 랴잔의 아파트에 폭발물을 설치한 혐의로 체포된 3명의 남자가 연방보안국 소속이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증거다. 당시의 보도를 보면, 이들이 설치한 폭발물은 이전의 모스크바 테러에서 사용된 것과 매우 비슷한 형태였다.

크렘린이 테러가 있기 전에 이미 폭파가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가디언>의 설명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저서는 후버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존 던롭이 2014년에 발행한 <1999년 9월 모스크바 폭발 : 푸틴 정권 초기에 발생한 테러리스트 공격>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존 던롭은 모스크바 테러를 러시아 정부가 기획하고 연방보안국이 실행에 옮긴 여러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 〈가디언〉은 만약 러시아 정부가 이 테러를 획책한 의혹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기획한 주범은 베레좁스키를 포함한 ‘옐친 패밀리’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 푸틴은 러시아의 차르인가?

미디어의 다원성, 매체의 독립성, 국가의 검열 환경 등을 설문해 각국의 언론 자유도를 측정하는 ’언론 자유도 인덱스’에서 러시아는 180개 국가 가운데 148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2년에 시작된 이 조사를 보면, 2002년에 121위였던 러시아의 언론 자유도는 푸틴의 집권기 동안 순위가 27계단 하락했다.

언론 자유화 지수를 조사하는 ’국경없는기자회’(RSF)는 러시아를 ’척박한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같은 기간 러시아가 RT(과거 ‘러시아 투데이’) 등의 미디어를 설립하고 이를 국영 매체처럼 운영하며 러시아를 미화하는 데 힘을 쏟은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012년 푸틴의 집권 이후 독립 미디어에 대한 압박과 웹 사이트 차단 등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들은 비판적인 언론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국가 선전물이 감당 못 할 정도로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의문을 제기한 사람 중에 살인을 당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언론의 자유도를 낮추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비판적 언론이 거의 사라진 미디어 독점 사회에서 국민의 80%의 지지를 받는 푸틴은 2018년에도 당선되어 6년의 임기를 채울 것으로 보인다. 개정 헌법상 한 번의 연임이 가능한 푸틴의 임기는 또 당선될 경우 2024년까지다.

2000년에 집권한 푸틴은 2008년까지 4년의 임기를 두 번 채우고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잠시 대통령 직함을 ‘빌려준’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6년 연임제로 헌법을 바꾼 후 2012년 다시 대통령직에 올랐다. 2024년까지 임기를 채우면 20년 동안 집권하게 돼 약 30년 동안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이어 러시아 현대사에서 두 번째로 길게 집권한 국가 수반이 된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