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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가 본 희망, 촛불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요"

“촬영장에 배은심 어머님이 몇 번 오셨어요. 저한테 ‘우리 한열이도 이런 친구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하셨어요. 순간 울컥하더라고요. 이 영화는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희생한 젊은이들의 이야기구나….”

말간 얼굴이 붉어지고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흐려졌다. 영화 '1987' 개봉 즈음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태리(27)는 그때 생각에 자꾸 가슴이 시리다고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로 시작해 이한열 사망으로 정점을 찍은 ‘6월 항쟁’을 다룬 '1987'에서 그는 유일한 허구 인물인 ‘연희’ 역을 맡았다. 연희는 ‘마이마이’로 유재하 노래 듣는 것을 즐기고, 가슴 설레는 연애를 꿈꾸는 평범한 87학번 여대생이다. 시위하는 선배도, ‘불온한 짓’ 일삼는 교도관 삼촌(유해진)도 잘 이해가 안 됐지만, 뜻하지 않게 6월 항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각성해 나가는 캐릭터다.

김태리는 허구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느낀 어려움에 관해 묻자 “제 역할이 연기하기가 오히려 쉬웠는지 몰라요. 선배님들은 살아계신 분들을 철저히 고증해야 했지만, 전 그저 시나리오에 나온 힌트를 따라 한 장면, 한 장면씩 공부하면 됐으니까요”라고 했다.

현대사에 약한 요즘 세대인 ‘90년생, 08학번’ 김태리에게 87년이 마치 구전동화 속 옛날이야기로 느껴지진 않았을까?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30년 전이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한열 열사는 사진이 너무 유명해 알고 있었는데, 박종철 열사에 대해선 <1987> 찍으며 배우게 됐죠. 촛불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젊은 친구들도 저처럼 느끼길 바라요.”

김태리는 '1987'을 찍으며 촛불시위 당시의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연희가 버스 위에 올라서는 엔딩 장면에서요. 종교를 믿진 않지만, 비유하자면 꼭 종교에 빠져드는 순간 같달까? 눈 감고 귀 닫았던 세상이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라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어요. 시청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함성이 울려 퍼지면서 천지가 개벽할 수준으로 바뀌고….” 그는 연희가 그때 느꼈을 감정이 “희망”일 거라고 했다. “영화 속 박 처장(김윤식)의 모든 것은 ‘애국’으로 귀결되잖아요? 연희에겐 ‘희망’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전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한마디 한마디가 거침이 없고 똑부러진다. 당돌하고 다부진 영화 속 연희와 겹쳐진다. 연희가 그랬듯 김태리도 '1987'로 인해 한 뼘은 더 자란 듯 보였다. '아가씨'로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해 ‘박찬욱의 뮤즈’,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1987'에서는 그런 꾸밈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준 터다.

정작 김태리는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 했다. “'아가씨'를 찍을 땐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괴로움이었어요. 근데 '1987' 때 그 생각을 똑같이 했어요. 저 원래 ‘잊어버리기’에 능한데, 영화 시작하고는 잊히지 않는 실수에 이불킥만 늘어가요. ‘난 왜 이렇게 부족할까?’만 생각하게 돼 괴로워요.” 그러면서도 ‘더 자란데다 얼굴도 예뻐졌다’는 덕담에 “화장해서 그래요. 근데, 전 풋풋한 게 더 좋아서 잘 모르겠네요”라고 받아치는 여유까지 부리는 걸 보니, 달라진 게 없다는 대답이 무색하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한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지만, 김태리는 다음을 향한 잰걸음을 벌써 내디뎠다. 이번엔 ‘드라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다. 어떤 목표를 향해 도전을 감행한 걸까? “잡생각으로 늘어난 괴로움을 타개할 방편? 하하하. 드라마 현장은 너무 바빠서 장난 아니래요. 괴로워할 여유도 없을 것 같아요.”

아직은 연기하는 즐거움에 푹 빠지지 못해 앞으로의 숙제도 “배우라는 직업을 즐기는 법 찾기”란다. 하지만 '아가씨'와 '1987'을 거치며 훌쩍 자란 걸 미처 깨닫지 못한 것처럼, 김태리는 이미 인터뷰를 ‘즐기는’ 자신을 모르는 듯했다. 뭐 어떠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채워야 할 필모그래피의 여백이 길고 긴 신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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