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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스타 뒤 '유령 노동자' 스타일리스트 보조의 눈물

  • 이진우
  • 입력 2018.01.02 04:26
  • 수정 2018.01.02 04:32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은 제 몸만큼 큰 가방을 가지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몰려 있는 홍보대행사를 들르는 게 일상이다. 연예인에게 협찬할 옷을 빌리거나 반납하는 게 주요한 일과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월4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만난 장주현(가명·22)씨는 자기 몸보다 더 큰 검은색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길이만 80㎝는 족히 돼 보이는 가방 안엔 비닐에 싸인 코트, 블라우스, 치마 등 옷가지와 구두가 잔뜩 들어 있었다. 장씨가 기자에게 한번 들어보라며 가방을 건네줬다. 가방을 들어보기만 했을 뿐인데, 무게 때문에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장씨는 한 드라마 조연배우의 스타일리스트 보조(어시스턴트)로 7개월째 일하고 있다. 이날 장씨는 이 가방을 들고 4시간 반째 압구정 로데오 거리 인근을 헤매고 있었다. “오늘은 종일 촬영을 마친 협찬 의상을 반납하고 픽업(pickup, 연기자에게 입힐 새 의상을 골라 협찬받는 일)하는 날이에요. 두 시간 안에 마쳐야 해요.” 말을 맺은 장씨가 가방을 둘러메고 자리를 떴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는 지난 11월28일 스타일리스트와 스타일리스트 보조(어시스턴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서울 스타일리스트 노동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보고서의 제목은 ‘유명 스타 뒤의 유령 여성 노동자’였다. 설문 참여자 203명 가운데 81.6%가 임금을 한 달 100만원도 못 받고 있다고 답했고, 하루 8시간 넘게 노동한다는 비율이 93.1%, 12시간 넘게 일한다는 비율도 40.7%나 됐다. 여성은 93.6%였고, 나이는 ‘20살에서 25살’이라고 답한 이들이 78.3%였다. 가장 많이 응답한 답변으로 종합하면, 20대 초중반의 여성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이 하루 8시간 넘게 일하면서 한달에 100만원도 손에 쥐지 못하는 셈이다.

이들은 왜 이런 장시간·저임금 노동 조건에 놓이게 된 걸까. 스타일리스트 보조의 노동 실태를 알아보고자 20년 차 스타일리스트 하수진(가명·48) 실장, 3년 차 스타일리스트 보조 김성연(가명·24)씨와 함께 지난달 4일 의상을 협찬받고 반납하는 현장에 동행했다. 이날 방문해야 할 ‘홍보대행사’는 모두 10곳이었다. 홍보대행사란 일종의 의상 협찬실이다. 브랜드마다 협찬실을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홍보대행사에 일정 수수료를 내고 연예인 협찬을 전담시키는 것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는 홍보대행사 30~40곳이 몰려 있다. 거리 곳곳에서 비슷한 차림의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오전 10시 반께 하 실장의 논현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는 이날 반납해야 하는 의상이 비닐봉지 여러 개에 담겨 있었다. 배우 2명과 방송인 3명을 위해 협찬받은 의상이다. 언뜻 봐도 50벌은 되어 보였다. 코트도 있어 봉투 하나만 들어도 제법 무거웠다. 이 옷들을 들고 협찬을 받았던 홍보대행사를 찾아가 돌려준 뒤, 담당 연기자의 콘셉트와 배역에 맞는 옷들을 다시 협찬받아 오는 게 이날의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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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을 협찬받고 반납하는 일은 20대 여성에게 육체적으로 버거운 일이다. 맨손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찬 바람을 맞으며 걷다 대행사에 들어가 대행사 직원과 함께 협찬받은 옷을 한점 한점 확인하며 꼼꼼하게 반납한다. 옷을 제대로 반납했는지, 옷에 얼룩이나 손상은 없는지 뒤탈이 없도록 잘 확인해야 한다. ‘별 이상 없이 반납했다’는 의미로 반납한 옷과 현장의 사진을 찍어놓는 일도 필수다.

반납 뒤에는 옷걸이에 잔뜩 걸려 있는 수백벌의 옷 가운데 연기자의 취향과 작품 성격에 맞는 옷들을 고른다. 한 장면 촬영에도 옷을 5~6벌은 챙겨야 한다. 현장에서 배우의 선택권을 존중해줘야 하는데다, 상대역들과 옷 색깔이 겹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보대행사마다 돌아다니면서 이 작업을 온종일 반복한다.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의 가방이 계속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신적인 고통도 있다. 협찬 현장에선 때아닌 ‘갑질’이 이따금 벌어진다. ‘톱스타’의 스타일팀이 아닌 이상 스타일리스트는 대행사에 철저한 ‘을’이 되기 십상이다. 이날도 그랬다. ㅇ의류브랜드 본사에서 협찬을 약속해 대행사에 들렀지만,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한테는 협찬하지 않는다”며 갑자기 퇴짜를 놓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어 보였다. 스타일리스트 보조 김씨는 애써 골랐던 블라우스와 치마, 정장 재킷을 자리에 돌려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협찬을 왜 갑자기 안 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대행사에 밉보였다가 앞으로 협찬을 취소할 수도 있거든요. 예전에 특정 촬영일에 협찬 가져가겠다고 예약(홀딩)한 의상을 다른 ‘톱배우’가 입기로 했다며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한 경우도 있었어요.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죠.” 유명세와 인기가 유일한 가치 척도인 스타 산업의 말단에서 얼굴 한번 마주치기 힘든 연예인은 이들의 계급장이 되기도 한다.

이날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만난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은 다들 비슷한 모습이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롱패딩을 입은 채 양쪽 어깨엔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과 박봉에 시달린다는 공통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한 지상파 방송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배우의 스타일리스트 보조로 3개월째 일하고 있다는 권은혜(가명·21)씨는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이쪽 업계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이 많고 월급이 적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월급이 50만원이에요. 연기자가 일주일 내내 드라마 촬영을 할 때도 있어서 하루도 쉬지 못한 적도 많아요.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일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알바해도 이것보다 돈은 더 받겠구나’ 생각하죠. 아직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처지예요.”

그렇다면 ‘톱스타’의 스타일리스트 보조라면 사정이 좀더 나을까? 2년간 대형기획사 소속 아이돌그룹의 스타일리스트 보조로 일했던 박지수(24·가명)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씨의 첫 월급은 ‘0원’이었다. 경력에 따라 급여가 올라 120만원까지도 받았지만, 처음 반년 동안 월급이 30만원에 불과했다. “가수, 특히 아이돌 쪽이 ‘열정페이’는 더 심해요. 몇달 동안 아예 돈을 주지 않는 팀도 있어요. 아이돌 팬이라서 (얼굴 보러) 들어온 건지, 진짜 스타일링하러 들어온 건지 검증해보는 거라고 해요.” 박봉보다 박씨를 힘들게 했던 건 24시간 ‘5분 대기조’처럼 살아야 하는 점이었다. 박씨의 노동 조건은 아이돌 멤버의 스케줄에 따라 결정됐다. 그나마 공식 일정이면 괜찮지만, 박씨는 아이돌 멤버의 개인적인 일정도 챙겨야 했다.

“고정적으로 쉬는 날이 없었어요. 집에서 쉬고 있다가도 아이돌이 부르면 나가야 했죠. 한번은 쉬는 날이었는데, 한 멤버가 특정 브랜드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개인 약속 자리에 가고 싶다면서 협찬을 빨리 받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구해서 갖다준 적도 있었어요. 그때 ‘현타’(현실자각타임)를 제대로 맞았죠.”

지난달 4일 강남구 논현동 하수진 실장의 사무실에 협찬 뒤 반납해야 할 의상과 신발 등이 쌓여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스타일리스트 업계를 ‘꿈 산업’이라고 표현했다. 스타일링을 전담하는 연예인이 늘어 자기 사무실을 유지하면서 ‘실장’으로 불리고 싶다는 화려한 ‘꿈’ 때문에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일리스트 보조 장주현씨의 꿈도 ‘실장’이다.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업계에 뛰어든 장씨는 “먼저 이 일을 시작한 선배, 친구들을 보면서 노동 조건 자체는 알고 있었다”며 “실장이 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장은 힘들지만 큰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실장’으로 독립한 뒤엔 자기 브랜드를 론칭한다는 더욱 화려한 꿈이 기다린다. 장씨는 “실장을 달고 연예인들과 친분을 쌓으면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가운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감당하며 화려한 스타 산업의 한축을 맡고 있지만, 이들 모두가 실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보조 생활 6개월 만에 실장을 달고, 누군가는 10년이 지나도 보조 생활만 전전하기도 한다. 하수진 실장은 “실장을 달기까지 평균 몇년이 걸린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장을 다는 일은 천차만별”이라며 “인맥이나 운에 따라 전담 연기자가 빨리 생기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10년 동안 보조 생활만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꿈 산업’은 언제까지 보조들의 눈물 위에서 유지돼야 할까.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은 대부분 회사가 아니라 실장이라고 불리는 스타일리스트(개인사업자)에게 고용돼 있다. 서울여성노조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스타일리스트 보조 가운데 94.5%가 사적인 고용 관계를 맺고 있다고 답했다. 교육과 고용이 중첩되는 도제식 업계 분위기 탓에 근로계약서를 썼다고 답한 이는 1.5%에 그쳤다. 4대 보험과 주휴수당, 최저임금 등은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이다. 김재민 서울노동권익센터 연구위원은 “스타일리스트 보조는 제대로 된 채용 광고나 공식 경로 없이 채용되는 경우가 많아 음성적인 노동 조건이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며 “(개인 대 개인의 계약이 줄어들 수 있도록) 협회, 직업소개소, 협동조합 등 공개적인 채용 경로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타일리스트 업계도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고질적인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2017년 7월 스타일리스트협회를 결성한 이들은 △근로계약서 작성 △최저임금 적용 등 최소한 근로기준법 준수를 이뤄내자며 업계 관계자를 설득하고 있다. 또 스타일리스트 경력에 따른 민간자격증을 만들어 최소한의 대우를 인정해주려는 움직임도 있다. 최숙희 스타일리스트협회장은 “민간자격증을 만들어 경력에 따른 최소한의 대우를 보장하고, 공식적인 채용 창구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화려한 스타 산업의 한축으로서 ‘제몫 찾기’ 요구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스타일리스트 업계에선 “연예인들이 버는 만큼 스타일리스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원성이 높다. 업계에 따르면 연예기획사가 스타일리스트 실장에게 지급하는 돈은 신인 연기자 100만원, 중견급 250만~300만원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사무실 임대료와 인건비, 세탁 비용 등을 따지면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에게까지 돌아갈 몫은 얼마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 협회장은 “화려해 보이는 스타일리스트 업계에 진입하려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연예기획사에서 오히려 저가 경쟁을 부추기는 상황”이라며 “대다수 실장들이 보조들에게 월급을 올려주고 싶어도 올려주기 힘든 처지”라고 말했다. 김정임 전국여성노조 서울지부장은 “스타 산업의 기본적인 시스템이 스타들은 엄청난 돈을 벌고 다양한 스태프들이 저임금으로 화려한 산업 구조를 떠받치는 형태”라며 “기획사와 스타일리스트 사이의 이윤 배분이 적정하게 조정되지 않으면 장시간 저임금 구조는 바뀌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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