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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갑질 일기'를

'직장갑질119'가 문을 연 지 두 달. 폭언, 반말, 모욕, 인격모독은 흔한 갑질이었다. 1만 포기 김장, 자녀 결혼식 동원, 인민재판 징계, 개·닭 사료 주기, 화장실 갈 때 문자 보고 등 황당 갑질도 적지 않았다. 노동부와 국가인권위는 실명이 아닌 사건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 박점규
  • 입력 2017.12.26 06:52
  • 수정 2017.12.26 06:57

국가인권위원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중소 종합병원을 그만둔 간호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민간 공익단체 '직장갑질119'(gabjil119.com)에 편지를 보냈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직원들을 모아 강제로 교육을 시켰고, 교육비를 반강제로 걷어갔으며, 교육비를 상납하지 못한 직원은 '왕따'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병원이냐고 묻자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했다. 당황스러웠다. '직장갑질119'를 만든 이유, 함께하는 사람들, 제보자를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 후에야 그는 병원을 말해줬다. 한 시간여 통화, 그는 병원 비리 등 충격적인 사실을 쏟아냈다. 만나서 증거 자료를 정리하고 언론에 알리자고 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생각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를 설득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병원 동료들이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넣었는데, 연관성이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라는 성의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공익제보자들은 괴롭힘을 못 견디고 병원을 떠났다. 그는 "아직도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진실을 알리면 국가의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업계에서 매장당한다는 걸 경험했다.

'직장갑질119'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한림대 성심병원도 비슷했다. 간호사들은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신원을 철저히 보호하는 인터뷰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언론의 관심은 금세 시들해진다고,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병원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는 글을 네이버밴드에 올렸다. 하나둘 연락이 닿기 시작했다. 작은 용기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밴드 결성 20일 만인 12월1일 4개 병원에서 노조(보건의료노조 한림대의료원지부)가 결성됐고, 조합원이 1900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지금도 1015명이 모인 밴드는 제보와 토론으로 넘쳐난다.

임금을 떼이거나 해고당한 제보자에겐 법률 답변을 통해 스스로 노동부 진정이나 노동위원회 구제신청을 하도록 안내한다. 심각한 제보는 직접 만난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지 않도록 증거를 모으게 한다. 언론에 알리기까지 한 달 이상 걸리기도 한다.

'직장갑질119'가 문을 연 지 두 달. 폭언, 반말, 모욕, 인격모독은 흔한 갑질이었다. 1만 포기 김장, 자녀 결혼식 동원, 인민재판 징계, 개·닭 사료 주기, 화장실 갈 때 문자 보고 등 황당 갑질도 적지 않았다. 노동부와 국가인권위는 실명이 아닌 사건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노동부와 인권위가 알려줬다며 '직장갑질119'를 찾아온 상담자도 있었다. 갑질이 좀비처럼 번져가고 직장이 지옥으로 변해가는데 국가기관은 인력 핑계, 근거 타령이나 하고 있다. 구멍 난 노동행정과 기존 노동운동의 빈틈에서 씨를 뿌린 '직장갑질119'는 공감과 신뢰를 거름으로 해서 자라고 있다. 다행히 언론의 관심으로 갑질 해결의 효능감이 높아졌다.

2017년 촛불이 권력을 바꾼 것처럼 2018년 직장을 바꿀 수 있을까? 우선 '갑질 일기'를 쓰자. 회사에서 당한 억울한 일을 꼼꼼히 기록하고 증거를 모으자. 혼자는 약하지만 모이면 강해진다. 같은 업종 직딩들이 온라인으로 뭉쳐 머리를 맞대보자. 이미 성심병원, 중소병원, 어린이집, 방송작가 온라인모임이 만들어져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만명이 넘게 일하는 파견지옥 1번지를 대상으로 '반월시화공단 온라인모임'도 출범한다. 당신이 용기를 내면 달라진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직장을 위해 새해에는 '갑질 일기'를 쓰자.

* 이 글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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