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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 따윈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회사에서는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할수록 바보가 된다.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일이 내게 돌아올 뿐이고, 월급은 거기서 조금도 더 높아지지 않는다. 열심히 보다는 열심히 하는 척하기, 많이 일하기보다는 많이 일하는 척하기, 중요한 일하기보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척하기가 더 중요했다.

  • 최지연
  • 입력 2017.12.21 12:55
  • 수정 2017.12.22 05:09

근대는 '하면 된다'의 노력으로 출발해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을 지나 '해야 한다'는 '노오력'으로 결국 삶을 파괴하는 파국에 도달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강박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우울이나, 제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를 터트리며 자기를 파괴하는 망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성과를 내면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오력 할수록 골병이 들거나 자신을 탓하며 자해하거나, 노오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날 때도 있다. _ '노오력의 배신' 47쪽 중에서     

마흔살 먹은 실장이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열심히 해서 사장님한테 칭찬 받읍시다." 

순간 어린이집에서 온 딸래미의 알림장에 쓰여있는 선생님의 글을 떠올랐다. "오늘 윤이가 처음으로 변기에서 응가를 해서 선생님들한테 엄청 많이 칭찬 받았어요. 집에서도 많이 칭찬해주세요." 

칭찬을 받는 것이 즐거워서 열심히 응가를 하는 내 딸래미를 움직였다는 그 '칭찬'? 그럼 이 실장은 지금껏 상사의 칭찬 때문에, 월급 주는 사장의 칭찬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실장 밑에서는 일을 '열심히'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건 당신의 칭찬을 갈구하기 때문이라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꺼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정에 대한 욕구(애정과 공감의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 나도 1-2년 차 때엔 상사의 인정과 칭찬이 나의 동력이었다. 하도 많이 깨지니 그 한 번의 칭찬이 고팠기도 했고, 어떤 게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니 칭찬을 바로미터 삼아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칭찬'이라는 것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찾아 하게 되고, 성과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남보다 더 많은 일을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건 적은 월급으로 더 세게 굴리며 많은 것을 뽑아내려는 회사의 전략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이든 '열심히'하는 것이 좋다고 배웠다. 부모님도, 학교 선생님도 그게 정답이라고 했다. 어릴적 지겹도록 들은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열심히 일하지 않은 베짱이의 최후를 보여주며 우리를 그렇게 세뇌시켰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베짱이는 내가 알던 우화의 결말과 달랐다. 베짱이는 늘 놀면서도 잘 살고 있었다. 오히려 개미가 벌어다 주는 것들에 숟가락을 얹어가면서 말이다. 반면 개미는 계속 일만 할 뿐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일해도 곳간은 채워지지 않았고, 채워지지 않는 곳간을 채우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만 했다. 개미를 위한 아름다운 결말 따위는 없었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할수록 바보가 된다.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일이 내게 돌아올 뿐이고, 월급은 거기서 조금도 더 높아지지 않는다. 열심히 보다는 열심히 하는 척하기, 많이 일하기보다는 많이 일하는 척하기, 중요한 일하기보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척하기가 더 중요했다. 사장의 칭찬? 적은 돈으로 그렇게 일을 하고 돈을 벌어다주는데 그까짓 칭찬 한번 못하겠는가. 상사의 인정? 열심히 일한 부하직원 덕분에 당신의 고과가 높아지고 연봉이 더 오르는데 열두 번은 더 못하겠는가. 회사에서 '열심히'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렇게 회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것들을 건드리며 그것들을 교묘하게 활용해 더 싼 값에 우리들을 움직이게 만들어 실리를 취했다. '열심히 일 해야지', '돈보다 보람이 있어야지', '책임감을 가져야지', '동료의식을 가져야지' 등등 우리가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하면 안될 것 같은 진리 아닌 진리를 들이대며 노동 착취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 말 앞에 "일은 받은 돈만큼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돈만 보고 일하면 안 되나요?", "회사 안에 동료가 어디있나요?"라고 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뻔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약속된 것은 기본적으로 '월급'뿐이다. 일을 일 답게 해주는 것은 결국 '회사에 제공하는 노동'과 그 대가로 받는 '월급'이라는 두 가지 요소다. 보람은 어디까지나 이 두 요소를 충족한 후 사람에 따라 얻을 수 있 는 '덤'일 뿐이다. 고작 덤에 불과한 보람을 위해 노동의 정당한 대가인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거나 '보람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일의 강도와 수준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_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7쪽

히노 에이타로는 회사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대학원 졸업 후 바로 창업을 했다. 웹서비스 개발 회사였는데 회사 운영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취직을 하게 되었고, 경영자와 회사원 양쪽 모두의 입장을 경험하며 노동 환경에 대한 모순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회사의 계략이며 사람들의 부당 노동 착취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책이다. 

칼퇴가 예외적인 상황이 되고, 휴가는 어쩔 수 없는 사유가 있어야만 쓸 수 있고, '일하는 사람'이 아닌 '사회인'이라는 거창한 말을 만들어 노동을 신성화하고, 일을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만들어 마치 회사님이 기회를 주는 것처럼 만드는 지금의 회사. 

그는 그런 우리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감히 상사나 사장님 앞에서는 내뱉지 못한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한 이야기, 혹시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까 두려워 꺼내지 못했던 회사원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고, 합리적이고, 통쾌하게 쏟아낸다.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보람보다 돈을 우선시 하는 게 그렇게 나쁜 생각이냐고, 일이나 보람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최대한 편하게 일을 하고 싶다고. 사람은 결코 일을 위해 사는 게 아니며, 고작 일의 보람 따위에 사생활까지 희생하면서 열악한 근무환경에 휘둘리는 게 너무 바보 같지 않냐고.

10년 전 나도 자기소개서에, 면접관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00회사에서 저도 함께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인재가 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직을 위한 면접에서 말한다. "일 하는 게 즐겁고, 보람도 느끼며, 저의 노하우와 회사의 장점을 결합해 성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10년 전과 지금 하는 말은 똑같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회사에서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 한다는 것, 그래서 더욱 뻔뻔스럽게 과장하고 패기 넘치는 표정까지 더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히노 에이타로가 책에 쏟아낸 말 정도는 다 안다. 일의 대가는 월급인데 왜 보람까지 따져야 하는지, 이 회사에서 배우는 건 막상 다른 데 써먹으려면 필요도 없는데 왜 회사는 돈도 주며 일도 공짜로 가르쳐준다고 생각하는지, 왜 사장도 아니고 주인도 내게 사장처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기를 원하는지, 어차피 서로 밟고 올라가야하며 일은 각자하는 건데 왜 동료의식이며 팀워크를 강조하는지, 회식은 선택이 아닌 회사의 필수행사라고 하면서 왜 근무시간에서는 빼서 계산하는지, 왜 선택은 다 같이 해 놓고 책임은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는지. 

하지만 나를 포함한 누구도 상사 앞에서, 사장 앞에서 당당하게 말 못할 것이며,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용기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회사는 어차피 솔직한 말이 아닌 그들이 필요한 말만 듣길 원할뿐이고, 말은 한다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일자리를 잃는 건 결국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와 우리의 거짓말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척 하면서.      

덧붙여, 10년 차가 되어서야 깨달은 너무 당연시 여겨왔던 회사의 논리들

  

1. 돈이 아니라 일의 '가치'와 '보람'을 보세요

-> 가치와 보람은 월급 다음에 오는 부가적인 것들이죠. 가치와 보람도 있으면 좋지만, 월급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2. 회사와 함께 당신은 성장할 것입니다.

-> 몸은 축났고, 갈 데는 없네요. 그나저나 성장한 저는 왜 해고 대상자인가요?     

3. 월급 받으며 일도 배우고, 이런 곳이 어디 있나요?

-> 회사에서 배운 일은 그 회사가 아니면 써먹을 데가 없더군요. 제가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이 회사에 적합하게 길들여지는 것이죠.      

4. '일'을 했으면 '책임'을 지세요

-> 책임은 월급에 비례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제 위에 상사는 왜 존재하나요? 일은 저 혼자만 하나요? 결정은 다 같이 해놓고 저한테만 책임을 물으시면 안되죠.     

5. 사장처럼 일하세요

-> 사장이 아닌데 어떻게 사장처럼 일을 합니까? 결정권도 없고, 월급도 다르고, 그래서 매출이 높아지면 제 자산이 불어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같은 마인드가 될 수 있죠?     

6. 우리는 '동료'잖아요. 먼저 퇴근하는 건 좀 그렇죠

-> 우리가 무슨 운명 공동체인가요? 각자 맡은 바를 해내면 되는 거죠. 그리고, 안하고 있어도 옆 사람들이 알아서 도와준다면 누가 업무 시간에 일을 하나요?      

7. 노력과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노력과 태도는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나요? 노력과 태도야 말고 계약을 해지할 때 단골로 나오던 말이던데요.      

8. 팀워크를 위해 회식과 등산은 빠지지 맙시다

-> 그럼 회식과 등산, 야유회는 업무 시간에 합시다. 회사 일이라면서요.     

9. 요즘 같은 시기에 일 할 수 있음을 감사히 생각하세요. 

-> 요즘 같은 시기에 저처럼 회사를 위해 야근 수당 없이 몸바쳐 일하는 직원에게는 고마워 하시나요?     

10. 열심히 일 하세요

-> 왜...요? 그럼 월급 올려주세요.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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