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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죽음, 철학자의 탄식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질문이 합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질문이 중요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색하고 있기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과업이기 때문이다.

  • 최성호
  • 입력 2017.12.20 11:23
  • 수정 2017.12.20 12:13

한 명의 꽃다운 청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탔다.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종현 말이다. 무대의 화려함, 팬들의 사랑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삶의 빈자리가 깊었나 보다. TV 속에서는 늘 자신감 넘치고 행복해 보이기만 한 아이돌 스타도 결국 혼자되면 외롭고 힘들면 슬퍼하는 하나의 작은 짐승일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새삼 일깨운다.

무서운 것은 이런 자살 뉴스가 이젠 그리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OECD 1위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나라이니 감각이 무디어질 만도 하다. 그래도 마음은 아프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했던,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도 백척간두에 서있는 심정으로 자살을 고민하고 있을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며온다.

인류의 역사에서 자살을 대하는 태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천양지차였다. 한쪽에서는 자살을 가장 숭고한 죽음으로 칭송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살을 도덕적으로 가장 지탄받아야 할 악행으로 비난했다. 자살은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비장하고 또 지독히 인간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의 문인 카뮈는 "철학에서 진정 중요한 문제는 하나뿐이고 그것이 바로 자살이다"는 유명한 구절로 그의 저서 『시찌스프의 신화』를 시작한다. 자살은 철학자들에게 늘 "못다한 숙제"와 같은 것이었다.

종교적인 논의를 제외할 때 자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크게 상반된 입장이 맞서고 있다. 흄(David Hume)으로 대변되는 자살찬성 입장과 칸트(Immanuel Kant)로 대변되는 자살반대 입장이 그것이다. 쉽게 그 입장을 설명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 목숨을 자기가 끊는 데 뭐가 그리 나쁘냐고 말하는 것이 흄의 입장이라면, 설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덕적 규범의 원천인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는 자살은 옳지 않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칸트는 인간의 합리적 의지를 모든 도덕 규범의 원천으로 봤다).

그런데 흄과 칸트의 대립은 자살의 종류에 따라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 한다. 먼저 충동적(unpremeditated) 자살과 숙고된(premeditated) 자살을 구분하고, 우리의 관심을 숙고된 자살의 경우로 국한하자(충동적 자살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숙고된 자살은 다시 자살의 동기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도피로서의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으로서의 자살이다. 도피로서의 자살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도피처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안락사가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누군가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행할 때 그는 도피로서의 자살을 행한 것이다. 이 도피로서의 자살에 대하여 흄과 칸트는 서로 상이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칸트는 도피로서의 자살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만고의 악행이라고 보는 반면 흄은 그것이 뭐 그리 부도덕하냐고 따져 묻는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한층 중요한 자살은 선택으로서의 자살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할복을 선택하는 사무라이를 생각해 보라. 그는 힘들고 고단한 삶을 도피할 목적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도덕적 가치(자신의 명예, 사상, 종교 등)라 여기는 것을 성취할 목적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영화 에어리언 3(Alien III)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자신의 몸에 에어리언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엘런 리플리(시고니 위버)가 용광로에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이 역시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가치(에어리언으로부터 동료들을 보호한다)를 성취하기 위한 자살이지 안락사와 같은 도피를 위한 자살이 아니다.

지금까지 어떤 상위의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를 살펴보았는데, 선택으로서의 자살에는 또 다른 중요한 카테고리가 있다 -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논점이다. 바로 죽음을 어떤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최종적 목적으로 선택하는 경우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죽음이 바로 죽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자살에 해당한다. 베르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것도 어떤 고매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왜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를 짓눌렀고, 로테와의 사랑을 맺지 못한 그에게 그 질문은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뉴스로 보도된 바에 비추어 샤이니 종현의 자살 역시 이 유형의 자살인 것으로 보인다.

안락사나 사무라이의 할복과 달리, 베르테르형 자살자들을 정신질환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베르테르형 자살자들은 대개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그들의 광기, 비이성, 비정상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통념 말이다. 그것은 토마스 사스(Thomas Szase)가 "도덕의 병리화(the medicalization of morals)"라고 부른 관점에 다름 아니다. 이번 샤이니 종원의 경우에도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는 말이 뉴스에 종종 언급되는데, 물론 정신병에 의한 자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모든 자살자에게로 일반화하여 자살자들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것은 자살의 문제에 대한 아주 그릇된 진단과 대응을 불러온다.

문득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우리를 바위처럼 무겁게 짓누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이 채 주어지기도 전에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고, 오늘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할지, 점심식사는 어디서 할지, 저녁에는 누구를 만날지와 같은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로 주의를 돌리기 마련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질문이 합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질문이 중요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색하고 있기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과업이기 때문이다.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혼신의 노력과 정성을 요구하는 풀타임 과업이다. 부산한 삶에 매몰된 대다수의 우린 단지 "왜 사는가?"라는 그 중차대한 질문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 중엔 그 질문을 그 본연의 무게 그대로 받아들이며 고뇌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끝내 찾지 못할 때 베르테르형 자살을 도모하게 된다.

그들의 고뇌는 철학적 고뇌이다. 그것은 인간이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철학은 아직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살의 부당함에 대한 칸트의 논증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 대목에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도대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 아닐까라는, 그래서 어쩌면 베르테르형 자살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철학은 영영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철학자가 탄식하는 이유이다.

나는 지난 학기 대학원생들과 "삶의 의미와 자살"을 주제로 세미나 수업을 진행하였다. 많은 이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철학적 문제로 고뇌하는 마당에 철학자가 그 문제에 대하여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무척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런 진리가 도대체 존재한다면 그 진리를 통해 그들에게 밀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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