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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이 가기 전에

서른의 나이에도 어김없이 12월이 찾아왔다. 겨울방학이 낯선 단어가 된 내게 유학을 간 지인이 전화를 했다. 그는 오늘 부터 방학이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발 닿는 곳으로 무작정 걷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면 거기서 느긋하게 끼니를 때울 참"이라고.

  • 손수현
  • 입력 2017.12.19 10:06
  • 수정 2017.12.19 10:33

딸랑. 딸랑. 딸랑.

문에 달린 자그마한 종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픈 배를 달래려는 직장인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나는 면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진한 라멘 국물을 앞에 두고, 감겨오는 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가게는 찬 공기를 잊을 만큼 아늑했다. 두 볼에 닿은 따스함에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애꿎은 면발만 휘휘 저었다. 이런 날씨엔 늘어지게 잠을 자다 노랗게 익은 귤을 하나 둘 까먹으며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잔뜩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이었다.

"우리 딸내미, 이번 겨울방학 땐 필리핀에 보내주려고.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어."

11살 딸을 둔 부장님이 말했다. 겨울방학.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은 내게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나마 최근 유학을 간 지인으로부터 들은 게 전부였다. 그는 오늘부터 방학이야, 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발 닿는 곳으로 무작정 걷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면 거기서 느긋하게 끼니를 때울 참이라고 했다. 그땐 그 말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그와 통화를 하던 날, 나는 11시가 되도록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날의 방학을 가만히 떠올려보게 되는 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방학 때마다 손이 트곤 했다.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느라 손등이 갈라지는 것도 몰랐다. 당시 살던 아파트 앞엔 과일이나 반찬거리를 파는 자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매일 같이 보는 그곳도 계절이 바뀌면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초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던 벚꽃나무도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만 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쓸쓸하다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첫눈이 내렸다. 가게 천막 위로 뽀얗게 쌓인 눈을 툭툭 치는 것도 털모자를 쓴 아저씨가 이리저리 군고구마를 뒤집는 걸 구경하는 것도 하루의 일과였다. 그렇게 20일가량 주어지는 방학 동안 우리는 그 계절과 꼭 붙어 지냈다. 봄에는 집 앞 살구나무가 어떤 옷을 골라 입는지, 여름마다 자신을 뽐내는 과일은 무엇인지, 계절과 함께 흘러갈 수 있었다. 방학은 또 한 번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간이었다.

서른의 나이에도 어김없이 12월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확인하는 SNS에서 '영하'라는 단어를 보고서야 겨울에 접어들었음을 체감한다. 매년 똑같은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 계절은 유독 서둘러 온 것 같다. 내 마음보다 몇 보는 앞서 걷는 느낌이다. 그날 밤엔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었다. 거리를 반짝반짝 수놓은 조명은 변함없이 눈부셨다. 이럴 땐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게 조금 이득이 된다. 거리마다 방울방울 달이 뜬 것만 같다. 아마도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조명 빛을 볼 수 있는 건 이 계절이 아닐까. 눈이 내려 도시가 고요해져야만 나는 이 풍경에 더 오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계절을 마음껏 누릴 방학이 없어진 지금,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올해의 첫눈을 보지 못했다. 핫초코 그리고 의자, 아니 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만 있다면 그곳이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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