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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까지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야 할 이유가 있을까?

  • 허완
  • 입력 2017.12.12 08:47
  • 수정 2017.12.12 08:49
Passport, Republic of Korea
Passport, Republic of Korea ⓒyongsuk son via Getty Images

지난 몇 년 동안 동남아권 호텔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ㄱ씨는 현지 직원들이 호텔을 방문한 한류 스타의 여권에서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 따로 메모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하는 짓이냐’ 따져 묻긴 했지만, ‘호텔 규정상 필요한 일’이라는 대답에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ㄱ씨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호텔 숙박할 때 여권을 다 걷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인 주민등록번호를 쉽게 알아낼 수 있겠구나 걱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ㄴ씨도 찜찜한 기억이 있다. 중국 입국심사 당시 심사관이 여권을 검사하며 “이 번호가 당신 주민등록번호냐”고 물은 뒤 번호를 적어갔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별다른 항의를 하지 못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보이스피싱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고 한다.

개인정보 관련 범죄가 날로 조직화하는 가운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인의 개인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권에 고스란히 적혀 있는 주민등록번호 때문이다. 외국에 가서 숙박을 하거나 차를 빌릴 때 여권을 제시할 일이 잦은데, 이때 여권번호 말고도 국내에서 통용되는 주민등록번호가 통째로 공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 주민등록번호 또는 이와 비슷한 개인식별번호를 여권에 수록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스페인, 타이, 한국 등 6개 국가뿐이다. 미국·캐나다는 국가 차원의 신분증 제도가 아예 없고, 프랑스와 독일은 개인식별기호 대신 10년 동안 사용하는 한시적 신분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통합형 개인식별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 자체도 극소수인 상황에서, 이 정보가 나라 밖으로 샐 수 있는 통로까지 열어두고 있는 셈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이 2014년 1월29일 오전 서울 중구 무교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보인권 침해하는 주민등록번호제도 진정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법 개정 움직임으로도 이어진 바 있다.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여권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삭제하는 여권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여권의 본래 용도는 한국 국적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통용되는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법 개정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포르투갈은 ‘국민에게 단 하나의 고유번호를 할당하는 행위는 금지한다’고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개인식별정보를 정부가 일괄 관리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 가능성이 큰 일”이라며 “이를 여권에까지 기재해 해외 유출의 통로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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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인정보 #프라이버시 #주민등록번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