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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의 바벨탑

명성교회의 목사직 세습은 코미디다. 돈과는 무관하다는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교회를 사유재산으로 제 핏줄에게 상속하는 날것의 코미디다. 그런데 이 뻔뻔스러운 소극 안에는 종교와 자본주의, 영혼과 물질의 동시적 부패라는 근대적 삶과 사회의 본질적 문제가 들어 있다.

  • 김진영
  • 입력 2017.12.08 10:24
  • 수정 2017.12.08 10:31

명성교회의 목사직 세습은 코미디다. 돈과는 무관하다는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교회를 사유재산으로 제 핏줄에게 상속하는 날것의 코미디다. 그런데 이 뻔뻔스러운 소극 안에는 종교와 자본주의, 영혼과 물질의 동시적 부패라는 근대적 삶과 사회의 본질적 문제가 들어 있다.

본래 종교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종교는 고래로 금욕의 정신을, 자본주의는 그 태생부터 유물론적 욕망을 토대로 하는 인생관이자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워온 세계사도 신이 주인이었던 고중세와 그 신이 죽으면서 시작된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엄중히 분리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근대사는 오히려 자본주의와 종교가 끝없이 착종되고 결탁하는 역사를 보여준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그러한 역사적 모순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개혁은 루터 자신의 발등을 찍은 도끼였다. 그는 과거의 순수한 영성주의와 물질적 금욕주의를 복원하려 했지만 세상은 이미 그런 경건한 종교적 삶이 불가능한 초기 자본주의의 현실로 변모해 있었다. 루터가 자기 상실감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근대적 상황에 보다 현실적으로 착목했던 건 칼뱅이었다. 그는 시대에 순응하면서 자본주의를 기독교적으로 승인했다. 그것이 자본과 금욕을 교묘하게 봉합하는 청교도적 노동윤리다. 기독교인은 성실한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된다. 하지만 돈은 자기가 아니라 신을 위한 것이므로 절약과 검소의 금욕주의 윤리 또한 지켜져야 한다. 나아가 절약된 돈은 축적된 자본이 되어 더 많은 자본 확장을 위해서 투자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실한 노동을 통해 증거되는 신에 대한 믿음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윤리는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다. 본래 구체적 역사를 외면하는 이데올로그들이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듯, 기독교는 세상의 새로운 신으로 등극한 자본주의에 기생하면서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다.

본래 기독교 교리는 죄-속죄-구원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된 교리에서는 마지막 단계인 구원이 잘려나간다. 구원이 배제된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구조를 닮는다. 자본주의가 열심히 일할수록 빚만 쌓이는 부채 증식 구조이듯 구원이 생략된 기독교도 죄를 고백하고 속죄할수록 죄만 더 쌓이는 악순환 구조가 된다. 그런데 이 종교의 자본주의적 운명, 구원의 불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사제다. 사제는 죄의 전문가이며 재테크 전문가이다. 그는 구원이라는 궁극적 이념을 잘라낸 죄의 생산력이 얼마나 거대한 자본축적의 유통시장이 되는지를 안다. 그는 죄를 상품화하고 교회를 그 상품이 유통되는 재테크 시장으로 만든다. 고래로 죄의 고백과 속죄는 그것을 증명하는 물질을 통해서 대속되어야 했다. 제물이 없는 죄의 고백은 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죄만 남고 구원이 사라진 교회에는 물질의 대속만이 남는다. 대속의 제물은 화폐이고, 그 화폐가 종교 시장에서는 헌금이다. 대형교회는 구원 없는 대속의 헌금들이 쌓아 올리는 재테크의 바벨탑, 자본의 마천루이다.

자본주의가 끝없는 확장만을 알듯 대형교회의 바벨탑도 끝없는 상승만을 안다. 하지만 이 바벨탑은 바빌론의 바벨탑과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바빌론의 바벨탑에는 여전히 인간이 닿고자 하는 신의 영역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재테크 교회의 바벨탑에는 신의 영역이 없다. 있는 건 대속의 자본으로 끝없이 높아지는 구원 없는 죄의 바벨탑뿐이다. 이 바벨탑의 집념과 욕망은 막을 길이 없다. 그래서 바벨탑의 건축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이어진다. 그것이 세습이라는 대형교회의 철면피한 코미디가 보여주는 속살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대형교회의 바벨탑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토록 대를 이으며 높아지려는 걸까. 그건 구원 없는 제물의 탑을 쌓아서 신의 영역까지 자본으로 식민화하려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끔찍한 결론이 얻어진다. 그건 대형교회의 바벨탑이 불신의 절망 때문에 신마저 죄인으로 만들어 신을 없애고 종국에는 자기의 존재근거마저 없애려는 자기 파괴의 탑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종교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빼닮았다. 일찍이 발터 베냐민은 자본주의의 뿌리는 원시적 광기이며 그 광기 안에는 자기 파괴의 목적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종교의 광기가 되어버린 대형교회의 바벨탑은 자본의 광기가 지배하는 오늘의 종말론적 시대상을 고발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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