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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재계가 '가장 급진적인' 노동당 코빈 정부 출범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 허완
  • 입력 2017.12.08 14:08
  • 수정 2017.12.08 16:16
BRIGHTON, UNITED KINGDOM - SEPTEMBER 27: Labour Party leader Jeremy Corbyn delivers his keynote speech to delegates and members of the Labour Party on the annual conference at the Brighton Centre, Brighton, United Kingdom on September 27, 2017.    (Photo by Isabel Infantes/Anadolu Agency/Getty Images)
BRIGHTON, UNITED KINGDOM - SEPTEMBER 27: Labour Party leader Jeremy Corbyn delivers his keynote speech to delegates and members of the Labour Party on the annual conference at the Brighton Centre, Brighton, United Kingdom on September 27, 2017. (Photo by Isabel Infantes/Anadolu Agency/Getty Images) ⓒAnadolu Agency via Getty Images

지난달 30일,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은 영상 메시지를 하나 올렸다. 이 영상은 페이스북에서만 100만회 가까이 재생됐다. 연설 내용은 짧고 강렬했다.

"모건 스탠리는 우리가 위협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다. 우리는 (상위) 소수를 위해 조작된 이 망가지고 실패한 시스템의 위협이다."

코빈이 직접적으로 '저격'한 건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였다. 모건스탠리는 11월 말 낸 보고서에서 노동당이 집권할 경우 영국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파운드화가 하락하는 등 대혼란이 빚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지어 코빈 정부 출범은 영국 경제에 브렉시트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모건스탠리가 제시한 핵심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 30년 중 대부분은 정권 교체가 영국 증권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크지 않았다. 정책이 너무 급격히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매우 다른 정책 접근법을 감안할 때 현 지도부 체제의 노동당 정부가 집권할 경우,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노동당이 결국에는 더 급진적인 정책 구상을 순화시킬 것이라고 볼 여지도 분명 있다. 그게 아니라면 1970년대 이후 영국 정치의 가장 중대한 변동이 될 수 있다."

제러미 코빈 : 차기 영국 총리?

파이낸셜타임스(FT)는 7일 영국 노동당 정부 출범 가능성과 이에 대한 재계의 반응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비즈니스 리더들은 '극좌파' 영국 정부 출범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간단히 현재 영국 정치 지형을 살펴보자.

늘 '강성 좌파'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코빈의 정치적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다. 그는 지난해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온건파가 주도한 당내 쿠데타를 차분하게 진압한 뒤 다시 입지를 다졌다.

지난 6월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는 의석수(30석↑)와 득표율(9.6%↑*)을 모두 크게 끌어올렸다. 이번에도 여당은 되지 못했지만 보수당과의 의석수 차이는 98석에서 55석으로 줄어들었다.

* 1945년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기록한 것 중 가장 높은 득표율 상승폭이다.

지지율도 오름세다. 총선 이후 노동당 지지율은 집권 여당인 보수당을 역전한 이후 줄곧 우세를 보이고 있다. 가장 최근 조사에서는 8%p 차로 앞서기도 했다.

반면 상대편인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보수당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입지가 위태롭다. 언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메이는 승부수로 띄웠던 조기 총선이 완전히 실패한 뒤 겨우 연정을 꾸려 총리 자리를 지켰으며, EU와의 브렉시트 협상 과정에서 무능전략 부재를 드러내는 중이기도 하다.

당내에서조차 메이 총리가 다음 총선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총선 이후 실각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섣불리 총리를 교체했다가 정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당내 위기의식 때문에 일단 총리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평가다. '과도 총리'라는 말까지 나온다.

물론 당장 총리가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다. 노동당이 다수당이 되려면 현재 의석에서 64석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별다른 사건이 없다면, 다음 선거는 2022년에 실시될 예정이다.

다만 코빈이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로 점쳐지고 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도박사들의 예측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브렉시트 협상 진전 상황에 따라 또 한 번 조기총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브렉시트에 찬성했던 이들조차도 크게 후퇴한 메이 정부의 협상 전략에 불만을 드러내는 중이다. 보수당 안팎의 강경 브렉시트 찬성론자(Brexiters)들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메이 총리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는 형국이다.

노동당이 스코틀랜드국민당(SNP)과 연합정부를 구성할 경우 보수당 의석 7석만 빼앗아오면 코빈이 차기 총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싱크탱크 '센터포타운'은 유권자 숫자가 적은 45개 지역에서 노동당이 각각 몇 백표만 더 확보해도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코빈은 지난 9월 선데이미러 인터뷰에서 다음 선거에서 자신이 총리가 되면 향후 10년 동안은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요즘 부쩍 자신감에 차 있다. 당대표 선거에 출마할 때만 해도 본인조차 당선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역대 가장 급진적인 좌파정부?

'코빈 정부'의 등장이 임박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 만으로도 코빈은 단연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는 중이다.

FT는 코빈을 "이른바 '신자유주의' 컨센서스의 과감한 중단을 원하는" 인물로 소개하며 "이건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자유시장과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를 추구하며 내세웠던 '신 노동당(New Labour)'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FT의 평가대로 코빈은 취임 이후 노동당의 '좌클릭'을 이끌어왔다. 지난 총선 공약에는 고소득층 증세, 법인세 인상, 철도·에너지·우편 재국유화, 긴축정책 폐기, 대학등록금 폐지, 최저임금 인상 등이 포함됐다. 말하자면, 그는 영국 정치사에서 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아마도 가장 급진적인 차기 총리 유력 후보인 셈이다.

FT는 노동당 예비내각 멤버인 존 맥도넬도 주목했다. 코빈 정부가 집권할 경우 재무장관에 취임하게 될 그 역시 의회 내에서 손꼽히는 '강성 좌파' 정치인 중 하나다.

일례로 그는 지난 2015년 제러미 코빈 대표 당선 이후, 노동당의 새로운 경제 정책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코빈의 선거운동 캠프가 보수당 정부와 다른 노동당 대표 후보들의 지배적 경제 정책과 결별한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우리는 경제 위기를 초래하지도 않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세금 공제혜택 축소와 임금 동결, 복지 예산 축소 (같은 긴축 정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초고소득층 및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 축소를 통해 그들이 적절한 세금을 내도록 하고, 정부 재정을 주택과 인프라에 투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중략)

재정적자 감축과 함께 코빈 캠프는 우리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은행 및 금융 분야에 대한 효과적인 규제 제도 도입, 즉 완전한 글래스-스티걸** 시스템을 도입해 상업 및 투자은행을 분리시키는 것을 비롯해 기업들의 핵심 목표를 단기 주주 가치에서 장기 지속가능한 경제 및 사회적 책임으로 바꾸도록 하기 위한 규제, 망가진 회계 체계에 대한 급진적 개혁, 공공·협동조합·당사자 오너십을 비롯해 다양한 기업 형태 및 소유구조 확대, 생산 및 제조업으로 경제구조를 재조정하는 데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한 자본거래세 도입이 포함된다. (가디언 2015년 8월11일)

**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겸업을 금지한 미국 '글래스-스티걸법'을 뜻한다. 미국 대공황 이후 도입되었다가 1999년 폐지됐다. 2007-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오바마 정부 시절 일부 핵심 조항을 부활시켜 '도드-프랭크법'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재계의 복잡한 속마음

고소득층과 기업들은 노동당의 정책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다만 메이 총리의 보수당 정부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노동당에게는 있다. 바로 '소프트 브렉시트'다.

메이 총리는 '하드 브렉시트'를 주장해왔다. 협상 과정에서 상당 부분 기존의 강경한 입장이 후퇴했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애초에 브렉시트를 촉발시킨 게 보수당이라는 점에서 메이 총리도 일종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브렉시트에 반대했던 노동당은 영국이 EU를 떠나더라도 당분간은 EU 단일시장에 남고 관세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이 총리도 최근 이와 같은 유예 기간을 둬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했다.

기업들은 상품과 서비스, 노동력이 지금처럼 영국과 EU 회원국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노동당이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영구적인 단일시장 잔류·관세동맹 유지를 선언하길 바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브렉시트 찬성표가 많이 나왔던 지역이 노동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노동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한 재계 인사는 FT에 보수당이 더이상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보수당은 브렉시트 한 가지 이슈에만 집중하는 정당이 되어버렸다. 이 문제에서 나는 그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코빈과 맥도넬 등 노동당 지도부가 이전보다 온건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FT는 특히 맥도넬을 소개하며 "그는 구식의 은행가나 수학 선생을 닮았으며, 자신이 온건한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한다"고 전했다. "물론 그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맞지만, 그는 자신을 여전히 맑시스트 선동가라고 보는 시각을 일축한다"는 것.

일부 비즈니스 로비스트들은 맥도넬의 "뛰어난" 소통 기술을 언급하기도 한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기업인들을 안심시켜 노동당의 집권을 이끈 '새우 칵테일 공습(prawn cocktail offensive)'처럼, 맥도넬 역시 재계 인사들과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차 공습(tea offensive)"을 벌이고 있다. (그는 차만 마신다. 공짜 점심 같은 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 12월7일)

다만 재계는 여전히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영국산업연맹(CBI)의 조쉬 하디는 "분명 톤에 변화가 있다"면서도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지켜볼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영국상공회의소의 아담 마샬은 노동당 지도부와의 교류가 생산적이고도 이전보다 빠른 템포로 이뤄지고 있다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듣고는 있는데 재계의 우려를 경청하는 건 아니라고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재계의 우려, 그리고 코빈을 '과격 분자' 또는 '설익은 사회주의자' 쯤으로 여기는 보수 진영의 낙인이 과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노동당의 집권 준비 작업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왕립인사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지냈던 봅 커슬레이크 경(Sir Bob Kerslake)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들에게 그가 건네는 조언은 코비니즘이 "오래된 맑시즘의 환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이것(코비니즘)을 임금 정체나 통제 불능의 경영 이익 같은 사회적 우려에 대한 정치적 의사표시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기 위해 꼭 맑시스트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의 말이다. 그는 철도 국유화와 대학 무상교육 같은 노동당 몇몇 정책은 유럽 중도좌파 정당에서는 기본적인 것들이라고 말한다. (파이낸셜타임스 12월7일)

FT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내걸었던 공약이 코빈이 품고 있는 포부의 한계점인지, 아니면 집권할 경우 취할 더 급진적인 접근법의 전조일 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전했다.

전후 유럽의 '진보' 정치를 대표해온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일제히 서서히 무너져 가고 대중의 불만과 절망을 극우 정당들이 재빨리 흡수하고 있는 지금, 보수당 '대처리즘'의 시대와 노동당 '제3의 길'을 모두 지나 온 영국에서, 역대 가장 선명한 좌파 정부가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전환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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