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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만 아름다운 또 하나의 계급사회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눈높이를 낮추라고. 지금 같은 취업난에 작은 기업이라도, 비정규직이라도 들어가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그러면 회사는 곧 너의 노력에 너를 인정하고, 정규직을 시켜줄 거라고.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름 대신 '미스 김'이라고 불리길 자처하고,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이기를 바라며, 정해진 계약 외의 일은 일체 하지 않고 업무 외 시간의 일은 모두 추가 수당을 신청하는 슈퍼갑 계약직.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 문제를 꼬집는 동시에 어쩌면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을 그린 드라마였는지도 모른다.

미스 김은 일반적인 계약직과는 다르다. 오전 9시부터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오후 6시까지 '딱' 정해진 일만 하는 것만 하며, 주어진 업무 외 잔업은 물론 야근, 회식까지도 거부하며 만약 회사가 그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추가 수당을 신청한다. 업무 외 사적인 관계도 맺지 않으며, 회사는 철저히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한 곳으로 여기고 회사와의 계약도 딱 3개월 단위로만, 3개월간 일 해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정규직이라는 목표 아래 회사의 눈치를 보고 부당한 회사의 요구도 감당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네와 같은 갑남을녀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미스김의 엄청난 '능력'이 뒷받침된다. 가진 자격증만 170여 개, 컴퓨터 관련 자격증에서부터 외국어, 식품, 정비, 운전, 의료 자격증까지 할 줄 모르는 것을 꼽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일처리의 완벽함은 기본이다. 업무에서부터 잡무까지 그녀의 손만 닿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리 잡고 깔끔하게 해결된다. 그러니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그녀는 회사에 종속되느니 필요할 때 일하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저런 미스 김의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와 달라고 아우성이며, 제발 정규직으로 입사해달라고 회사가 먼저 요구하는 상황. 하지만 알고 보면 미스김에도 비정규직으로 인한 아픈 과거가 있었다.

과거 대한은행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던 미스 김에게는 어머니처럼 따랐던 진미자 계장이 있었고, 진 계장은 비정규직 철폐 운동을 하다 은행 화재 사고로 죽게 된다. 애정을 갖고 열심히 일했던 회사는 서로 다른 '고용'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동료들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있었고, 믿고 의지했던 동료들은 서로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낀 미스 김은 정규직에 대한 미련도, 동료에 대한 애정도 모두 버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하지만 서로 다른 고용 관계 속에서 일해야 하는 우리들, 그리고 정규직으로 올라가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비정규직들. '직장의 신'을 보며 미스 김이 부러웠던 건 비단 나뿐이었을까? '고용'의 문제에서 초연해져 살아갈 수 있는 미스 김처럼 우리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이처럼 공공기업, 공무원 등의 '드문 철밥통의 신의 직장'에 지원자가 몰리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기에, 결과적으로 반수가 넘는 청년들은 비정규직 혹은 계약직의 신분으로 첫 직장에 들어서게 된다. (중략)

이것은 실제로 청년들이 어렵게 회사로 진입한 이후에도, 이를 지속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해진 현재의 노동조건, 청년들의 기대와 바람과는 어긋나는 회사생활을 적나라하게 일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_ '노오력의 배신', 97쪽

우리가 정규직을 꿈꾸는 이유는 두 가지다. 안정된 고용과 같은 일을 한 것에 대한 같은 대가.

내가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을 때 그 회사는 1년간의 계약직을 제안했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 거라며 정규직과 급여도, 복지도, 성과에 대한 보상도 모두가 같지만 계약직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1년간 네가 하는 걸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사가 해고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고용해지라는 조건만 걸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당신을 잘 할 거고,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니 큰 걱정은 할 것 없다는 말뿐만인, 지키지 않아도 그만인 약속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들어간 그 회사에서 난 불과 몇 주 만에 사실 난 엄청나게 좋은 조건으로 이 회사에 들어왔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그 회사에는 수많은 고용관계가 존재했다. 우선 말 그대로 정규직인 정규직, 그리고 나와 같은 계약직인 듯 계약직 아닌 계약직, 정규직과 급여, 복지, 보상 등이 다른 진짜 계약직, 이름부터가 아이러니한 출퇴근을 해야 하지만 신분은 프리랜서인 상근 프리랜서, 시급으로 월급을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한 시간보다 훨씬 못 받으며 일하는 알바, 출근도 일도 이 회사를 위해 하지만 파견 형태로 고용되었기에 고용인데 대한 책임을 다른 곳에 있는 파견직 등이 그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곳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하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 다른 고용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아이러니했던 것은 우리 파트의 상황이었는데, 겨우 세 명이 있는 파트였지만 우리 셋은 모두 고용관계가 달랐다. 한 명은 정규직, 난 정규직 전환을 담보로 한 계약직(경력사원은 무조건 계약직으로 시작하는 게 사규라고 했고 1년 뒤 전환을 해주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며 채용했다), 나머지 한 명은 상근 프리랜서(이름은 프리랜서였지만 출퇴근도, 하는 일도 정규직과 똑같이 해야 했다)였다.

우리 셋은 연차도, 하는 일도 비슷했기 때문에 사실상 난이도도, 양도 비슷한 수준의 일을 했다. 하지만 인트라넷 상 직급이 있는 건 정규직에 불과했고(그 외의 고용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원'이었다. 그러니 인트라넷만 보고 연차와 비교해봐도 그 사람이 정규직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 명절 선물이 나오면 정규직과 계약직인 듯 계약직 아닌 계약직은 나왔지만 상근 프리랜서에게는 나오지 않았다. 제일 웃겼던 상황은 인센티브가 나왔을 때였는데, 당시 팀장은 나와 정규직에게만 문자를 보내 인센티브가 나올 예정이지만 팀 안에 못 받는 사람도 있으니 조심해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서 우리 셋은 잘 지내는 동료 이다가도 어느 순간 어색한 사이가 되어야 했고, 의도치 않게 누군가만 모르는 비밀을 만들어야 했고, 계약 문제가 나올 때면 서로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말 뿐인 계약직이라고 했지만 고용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은 참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용을 생각한다면 부당한 처사도, 엄청나게 많은 업무량도 감당해야 했고, 나를 평가하는 팀장과 그 외의 상사들, 심지어 같은 동료들 앞에서는 말조심, 몸가짐마저 다듬는 그야말로 치사하고 더러운 상황을 겪어내야 했다. 한편 정규직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적다고 한다면 솔직히 남은 기간을 이 회사를 위해 몸 바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재빨리 계약 해지 후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 적당히 버티며, 그 시간을 이용해 다음 직장을 혹은 다음 일을 준비하기, 하지만 당연히 그것도 쉽지 않았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긍정적인 상황이 되기를 바라고, 상상하며 어쨌든 월급 받는 일을 하며 다른 일을 준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몸 담았던 그 파트는 지금 없어졌다. 물론 모든 것이 '고용'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모두가 상처받았고 모두가 떠났다. 여전히 그 회사는 정규직이 아닌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락거리고 있으며, 어차피 자신들의 밥그릇은 안전하다고 깨달은 정규직은 몸값만 무거워진 채 그저 자리만 채우고 앉아 있게 되었다.

사람을 비용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언제든, 누구든 이 회사라면 이름만 보고 들어올 것이라 믿었던 회사는 사람이 없으니 상품의 퀄리티는 떨어졌고, 시장에서 밀려났으며, 인재들은 눈을 돌렸다.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또 정규직으로 가기가 쉽지 않잖아요. 제 꿈은 무기 계약직이에요."

_ 어느 비정규직 교사의 말

"자기가 한번 처음에 비정규직에서 시작하면 거기서 소모되어버리고 아무리 노력해서 경력과 경험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정규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_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원의 말

'sbs 스페셜 435회.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 인터뷰 중에서

경영학의 대가는 물론 대기업의 인사채용관이나 CEO들은 한결같이 경영에서의 중요한 가치로 '인재'를 꼽는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인재가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취업 시장에서 구직자가 체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정규직의 자리는 아주 한정적,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고용의 형태는 더욱 복잡 다양해지고, 머리(기획력)를 필요로 하는 업계일수록 정규직은 한정적, 비정규직만 난무해진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눈높이를 낮추라고. 지금 같은 취업난에 작은 기업이라도, 비정규직이라도 들어가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그러면 회사는 곧 너의 노력에 너를 인정하고, 정규직을 시켜줄 거라고.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밑에서부터 올라간 정규직은 손에 꼽을 정도.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만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했으며, 회사는 2년만 쓰고 대체자를 찾지 결코 그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지 않았다. 회사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첫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작했는가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한 낙인을 찍으며, 태생부터가 정규직이면 정규직으로, 태생이 비정규직이면 당연히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려 했다. 노력으로만은 극복할 수 없는 일종의 계급 같은 것이었다.

2016년 5월에 방송했던 에서는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중 우선 일을 시작해보자며, 일을 하다 보면 비정규직 교사가 된 어떤 한 교사의 꿈은 소박하다 못해 처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소원은 정규직도 아니고, 연봉 인상도 아닌 '무기계약직'. 처우가 달라도 괜찮고, 그 안에서 박탈감을 느껴도 괜찮으니 출산 후에도 돌아가서 일 할 곳이 있고, 매년 계약 시즌이 오면 조바심을 내는 대신 안심하고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완장 아닌 완장, 계급 아닌 계급.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오늘도 서로 다른 처우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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