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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비정규직' 그만 쓰면 어떨까

어떤 삶도 비정규일 수 없다. 고용 형태가 어떻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은 단어 자체가 비윤리적이다. 누구라도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의 사회보장 역할을 빠르게 키우는 것도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정책 지향점이다.

  • 이원재
  • 입력 2017.12.06 07:08
  • 수정 2017.12.06 07:11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하나 열린 것 같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들이 온갖 욕망과 함께 뭉뚱그려져 들어 있던 상자다.

지난해 11월 학교의 영양사, 조리원, 교무보조 등을 계약직에서 교육공무원으로 전환하자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을 때였다. 수많은 정규직 교사들과 임용시험 준비생들이 반대에 나섰다. 올해에는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논의가 시작됐다. 정규직 교사들과 임용시험 준비생들은 다시 거세게 반발했다.

다음에는 서울시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서 일이 벌어졌다. 서울시는 공사 소속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 했다. 그러자 청년 정규직들이 분노하며 집단 반발했다. 가장 최근에는 인천공항공사다. 정부가 외주 용역 노동자 9천여명을 정규직화하려 하자, 1천여명의 본사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에 나섰다. 젊은 직원들은 공청회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공정한 입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정경쟁!'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었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입사하게 되더라도 공개경쟁채용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된다면 멀쩡히 공항에서 계속 일하던 외주 용역 노동자가, 갑자기 채용시험에 응시해야 하고 몇몇은 합격해 공사 직원이 되고 몇몇은 떨어져 일자리를 잃게 될 판이다.

애초에 '정규직'이란 무슨 의미일까? 노동자에게는 정년까지 지속되는 안정적 고용과 차별받지 않는 공정한 고용이 핵심적 요소다. 고용주의 직접 고용도 한 요소다. 높은 지위나 높은 소득은 그 의미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정규직'은 오히려 하나의 신분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수많은 이들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려 고생하고, 그중 극히 일부만 그 바늘구멍을 통과해 그 자격을 획득한다. 높은 처우와 지위가 보장되지 않으면 억울할 만도 하다.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않고 진입하려는 이들에게는 분노가 치밀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규직의 정의에 포함된 안정성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자격 있는 몇몇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안정적 삶,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안정적 바탕이 있어야 자기주도적 삶을 살 수 있고 혁신과 창조도 가능하다. 또 사람에게는 차별받지 않고 공정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같은 일을 하면 최소한 비슷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다.

그런 보편적 권리가 자격시험을 통과한 이들만 누리는 특권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안타깝다. 이 권리를 넘보면 '불공정한' 행동으로 이해되는 세태는 참담하다. 굳이 '일할 자격'이라는 것을 따진다면, 그 자격은 그 일을 성실하게 잘하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이 옳다. 과거에 치른 시험 결과가 부여하는 '자격'보다는, 지금 이 순간 현장에서 보여주는 '능력'이 우선이다. 자격을 따지는 작업장보다는 능력을 따지는 작업장이 공정하며 미래지향적이다.

이 문제 전체를 꿰뚫는 답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우선 신분제처럼 사용되는 '정규직', '비정규직' 용어를 그만 쓰면 어떨까? '정년계약직, 단기계약직'으로 불러도 그만이다. 노동정책은 '정규직화' 대신 애초 그 내용인 고용 안정화와 차별 금지를 지향하면 된다. 작지만 큰 변화일 수 있다.

어떤 삶도 비정규일 수 없다. 고용 형태가 어떻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은 단어 자체가 비윤리적이다. 누구라도 정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의 사회보장 역할을 빠르게 키우는 것도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정책 지향점이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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