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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퀴어 영화의 달콤쌉싸름한 아름다움

ⓒSONY PICTURES CLASSICS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보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24세의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가 비옥한 이탈리아 시골에 도착하는 것을 학구적인 17세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가 침실 창문으로 바라본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무기력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올리버를 만난 엘리오는 그를 데리고 나선계단을 올라가 그가 6주 동안 머물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들의 교류는 와이드샷 만큼이나 미온적이다. 미국에서 이탈리아까지 오느라 지친 올리버는 저녁을 먹고 싶어하지 않고, 새 친구를 만들 생각도 별로 없어보인다. 그는 엘리오가 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마자 코를 곤다.

그러나 엘리오의 눈에는 무언가가 있다. 혼란이 떠오르고, 어쩌면 관심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엘리오의 얼굴을 한참 비쳐주는 장면에서도 그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란 어렵다.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엘리오 본인도 자신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 햇살이 어쩌면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햇빛은 무성한 잔디밭을 비추고, 반숙 달걀과 마을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올리버는 엘리오, 엘리오의 부모님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엘리오는 식탁 맞은편에서 올리버를 유심히 바라본다. 카메라는 엘리오의 시선을 따른다. 올리버의 목에 매달린 작은 은제 다윗의 별을 본다. 갑자기 클로즈업이 되고, 단추를 채우지 않아 V 모양인 올리버의 컬러 사이에 별이 보인다. 격렬한 욕망이 화면에 넘실된다. 엘리오가 남몰래 넋을 잃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퀴어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심리적 전쟁 감각이다. 이로 인해 사춘기 때의 시선은 그냥 시선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헐리우드는 게이의 민감함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지금은 진화하는 중이다. 극찬을 받았던 안드레 애치먼의 2007년 소설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영화화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그 증거다. 11월 24일에 소규모로 개봉했으며 오스카를 노리는 이 감각적인 영화는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고통스러운 정치학을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예전의 대부분의 퀴어 영화들과는 달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첫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큰 비중을 두었다. 호평을 받았던 2015년의 ‘캐롤’과 2016년의 ‘문라이트’의 계보를 잇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세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굉장히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볼 수도 있다. 195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캐롤’은 세상에서 격리된 두 백인 여성의 이야기다. ‘문라이트’는 현대의 마이애미 도심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좇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레이건의 보수주의가 미국을 휩쓸던 1983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는 박식한 사람들을 다룬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게이 로맨스를 다루는 프레임의 전형적인 예가 된 귀감들이다. 중심 캐릭터 아무도 죽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비참한 처벌을 받는 사람도 없다. 모든 영화의 끝에서는 달콤쌉싸름한 희망이 반짝인다. 역사적으로 퀴어 이야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브로크백 마운틴’, ‘필라델피아’, ‘싱글 맨’, ‘천상의 피조물’, ‘아이다호’와 같은 훌륭한 영화들도 마찬가지였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문라이트’, ‘캐롤에는 다른 유사성도 있다. 관객에게 감정을 일일이 떠먹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엘리오와 올리버, ‘문라이트’의 샤이론(트레반트 로즈가 연기한 성인의 샤이론)과 케빈(안드레 홀랜드), ‘캐롤’의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는 엄청난 황홀감, 낭만적인 첫 만남은 없다. 모두 천천히 시선을 통해 서로에게 구애한다. 말로 하는 이야기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대부분의 구애는 은밀하다. 사유지의 호수 근처에서 몰래 한 키스, 늦은 밤에 해변에서의 마주침, 아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동차 여행. 이 캐릭터들에게 있어 로맨스는 자아 발견과 함께 벌어지고, 또한 자아 발견의 결과가 로맨스다. 이 영화들은 예측 가능한 헐리우드의 표준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차갑다’는 잘못된 딱지가 붙었다.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은 10월에 “지배적 문화에 속하지 않는 이야기를 지배적 문화에 가져오려면 감정적 번역이 필요하다. 지배적 문화는 위무와 감정적 보호, 적절한 감정적 반응의 혼합을 요구한다. 그런 걸 주지 않는 영화는 컬트 영화라 불린다. ‘관습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이 있으면 이 캐릭터들에게 공감하겠어. 하지만 그런 게 없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야.’라는 식이다. 지배적 사회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우리가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라고 허프포스트에 말했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는 여름의 끝이 다가올 때에야 정점에 달한다. 엘리오의 아버지(마이클 스털버그)는 학자고 올리버는 그의 제자다. 엘리오의 아버지를 도우러 이탈리아 북부의 엘리오네 빌라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 올리버는 행동을 조심한다. “중요한 일들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얼마나 적은지 네가 알기만 했더라면.”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말한다. 자기가 가장 잘 모르는 것은 자신이 이끌리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걸 마침내 드러낸 것이다. 이 결정적 문장은 캐롤에 테레즈에게 품은 감정과 비슷하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야,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아.” 그리고 십대의 샤이론은 해질녘에 케빈에게 말한다. “나는 앞뒤가 안 맞는 일들을 많이 하고 싶어.”

이러한 서정적 말들은 이 이야기들의 정수를 이루는 동시에 모든 게이들이 억누르는 갈망의 정수를 보여준다. 아무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아침 식사 밥상에서 몰래 나누는 시선에 묻혀 있을 때는 더욱.

“나는 그들이 겪었던 감정적 여정을 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느낌이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 아닌가?” 구아다니노의 말이다. 그의 전작으로는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등의 쾌락주의적 영화가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문라이트’, ‘캐롤’의 캐릭터들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처럼, 혹은 ‘금지된 사랑’의 존 쿠삭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방 창문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졸업’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식을 망칠 수도 없다. ‘노팅 힐’, ‘카사블랑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처럼 진정한 사랑에 대한 열정적인 연설을 늘어놓지도 못한다. ‘러브 액추얼리’에서처럼 종이에 글을 적어보여줄 수도 없다.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런 행동들은 너무 공공연히 드러나고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헌신은 아주 조금씩 늘어난다. 엘리오는 방어적으로 행동하며, 올리버가 작별 인사로 “다음에 봐!(later)”라고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부모에게 말한다. 나이트클럽에서는 여성과 춤을 추는 올리버만 바라본다. ‘침묵을 참을 수 없다’ 같은 말을 쪽지에 쓴다. 올리버의 다비드의 별을 목에 건 채 호수에서 나온다. 보통 이성애의 이야기에서라면 이런 기표들은 훨씬 더 거창했을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들이 사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 둘이 이어지게 도와주었을 것이다.

기다림이 괴로웠기에, 엘리오가 비밀스러운 추근덕거림으로만 만족할 수 없다고 결심한 뒤 두 사람이 나누는 첫 키스 만큼 강력한 황홀한 순간은 드물다. 피날레는 ‘캐롤’과는 다르다. ‘캐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테레즈를 보며 캐롤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끝난다. 그들은 문화적 장애가 정말 많지만 사귀어 보기로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의인화 함으로써, 퀴어의 갈망에 대한 섬세한 언어를 빌려와 현대 영화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이 이 영화들에서 등장한다.

“[‘문라이트’의 세 번째 챕터에서] 두 캐릭터가 처음 포옹할 때, 트레반트의 손이 안드레 홀랜드의 셔츠 뒤에서 머뭇거리는 게 보인다. 샤이론이 10년 만에 마침내 이 사람의 눈을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 넋을 빼앗는, 그리고 무서운 일인지 볼 수 있다. [...] 내겐 그 다정함만을 보여주는 게 정말 중요했다. [...] 이 환경, 서로를 만지는 두 남성의 육체성의 본질이 중요했다.” 베리 젠킨스 감독이 작년에 허프포스트에 한 말이다.

동성 커플이 서로를 만지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많아지고 있지만, 게이의 가시성은 아직도 험난한 영역이다. 인디 영화 영역에서 뚫고 올라오는 퀴어 영화가 매년 한 편 뿐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1월에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때 호평을 받았고, 2017년에만 해도 ‘바닷가의 쥐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120 BPM’, ‘신의 나라’, ‘프린세스 시드’, ‘델마’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AIDS를 주제로 한 ‘120 BPM’도 마찬가지다.

즉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탐구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화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마침내 활짝 꽃피고 난 뒤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우린 정말 많은 날들을 낭비했어.”라고 말한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게이임을 인정하지 못해 그 시간이 더욱 짧아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프얀 스티븐스의 발라드 ‘Mystery of Love’ 가사처럼, “내가 얼마나 많은 슬픔을 견딜 수 있을까? / 내 어깨에 앉은 검은 새 / 이 사랑이 끝나면 / 무엇이 달라질까?” 여름은 끝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슬픔이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도취시키는 황홀감은 영원하다. 여러 모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가슴아픈 클로즈업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Call Me By Your Name’ And The Bittersweet Beauty Of Queer Cinema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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