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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제국' 출간하는 미국인 기자 "북한 취재보다 어려웠다"

미국인 기자 제프리 케인은 지난 7년간 ‘삼성’을 줄기차게 파고들었습니다. 국내 일부 언론에서 삼성 ‘가’(家)가 마치 ‘왕족’처럼 다뤄지는 상황이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시작은 쉬웠지만 정작 취재는 평탄치 않았습니다. “북한을 취재하는 것보다도 어려웠다”는 케인에겐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요? 그는 7년의 취재 결과를 담은 책 <삼성 제국>(Samsung Empire·가제)을 내년 2월 출간할 예정입니다.

2009년. 미국의 시사전문 인터넷 매체 '글로벌포스트'의 수석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제프리 케인은 다른 외신기자들처럼 북한 문제에 주로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삼성의 한 사업장을 방문했다가 받은 ‘충격’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사내 곳곳에 이건희 회장을 찬양하는 글들이 넘쳤고, 몇몇 고위 임원들은 회장의 연설이나 어록을 달달 외우더라. 마치 북한 사회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현장에서 받은 이날의 경험은 그의 관심을 한국 사회, 특히 ‘삼성 문제’에 내내 달라붙게 했다. “이 회장 일가가 한국의 언론에서 마치 왕족처럼 다뤄지고, 한국의 젊은이들이 삼성에 채용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후 케인은 '글로벌포스트'는 물론이고 미국의 경영 전문지 '패스트 컴퍼니' 등에 삼성 관련 기사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범삼성가’의 고위 관계자를 포함해 삼성 임직원, 국내외 경쟁업체 직원, 학자 등 1000여명을 두루 만났다. 케인은 그동안의 취재 내용을 담은 책 '삼성 제국'(Samsung empire·가제)을 내년 2월 미국에서 출간한다.

케인은 한국에 오기 앞서 캄보디아에서 '이코노미스트'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아시아 담당 전문기자로 활동했고, 캄보디아의 노동 문제를 다룬 탐사보도로 2015년 아시아출판인협회가 주는 ‘아시아 최고 기자상’을 받았다. 2015년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체제의 북한 사회를 취재하기도 했다. 케인은 약 6년간 한국에 머물다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21일 만나 삼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삼성 문제에 매달린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국은 이른바 ‘재벌’을 통해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이면에는 많은 문제점도 있다. 삼성은 한국 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취재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실제 삼성 가문 구성원들도 만났나?

“이건희 회장이나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씨제이(CJ), 한솔, 신세계를 포함해 범삼성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만나봤다. 되도록이면 이들을 자주 접촉하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진실에 근접하는 증언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해서다.”

자부심과 비판의식 뒤섞인 젊은 ‘삼성맨’들

―직접 만나보니 어땠나. 기억나는 일화라도 있나?

“스스로를 ‘로열패밀리’라고 지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가문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는 자부심을 자주 드러내곤 했다. 삼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의 왕, 일본의 재벌 연합, 심지어 북한 정권도 공부해야 했다. 그 본질이 비슷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와 비유할 만큼 삼성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가 궁금하다.

“비판이 아니라 단지 시대상이 그렇다는 거다. 삼성이 성장하기 시작한 1960~1970년대 한국은 기존의 북한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정치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한국만의 특수한 기업 문화가 만들어졌다. 보스(회장)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운영 방식이 (기업에도) 스며든 것이다. 현대·엘지·롯데 등 한국의 다른 재벌에게도 이러한 ‘군대’ 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삼성을 상대로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이 천막농성을 벌인 지 782일째인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그룹 본사 앞 농성장 모습)

케인은 특히 신입사원부터 과장급에 이르는 이른바 젊은 ‘삼성맨’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한번은 삼성 직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삼성 서머 페스티벌’이라는 사내 체육행사가 마치 북한사회의 전시행사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는 있더라.” 그럼에도 직원들의 ‘충성스러운 태도’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건 그에겐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직접 만나본 삼성맨들은 주로 어떤 얘기를 하던가?

“삼성에 입사했다는 자부심과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는 비판의식이 뒤섞인 모습을 보였다. 삼성과 자신이 ‘애증’ 관계라는 것이다. 삼성의 공동체 정신은 존중하나 이 회장 일가의 황제 경영은 잘못됐다고 보는 식이었다.”

―책 제목에 ‘제국’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만일 애플, 페이스북, 우버 같은 기업에 대한 책을 썼다면 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제품을 개발·제조·홍보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전형적인 기업이다. 반면 삼성은 마치 드라마와 같은 서사를 가지고 있는데, 세습 경영, 왕좌(경영권)를 둘러싼 쿠데타, 내홍 등이 그것이다.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드러난 형제의 난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아마 한국의 재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업 운영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평가도 있지 않나?

“‘삼성맨’의 충성심은 1980년대까지는 중요했다. 삼성의 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1983년 삼성의 첫 반도체인 64K D램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밤새 64㎞를 행진했다고.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세웠다’는 그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한국인 특유의 정신력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고 기존 재벌 문화의 부작용을 정당화할 순 없다.”

―어떤 부작용을 말하나?

“삼성은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면서도 ‘가족 경영’을 유지하는 등 기이한 양면성을 보여왔다. 정작 삼성은 대외적으로 ‘뛰어나고 세련된 기술기업’으로 인식되길 바란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봉건제에서나 볼 법한, ‘삼성맨’의 충성심만으론 한계가 있다. 게다가 노동자의 인권을 대하는 태도도 문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삼성과 거래하기 위해 모든 걸 쥐어 짜낼 수밖에 없었던 중소업체와 노동자의 희생 덕분에 삼성이 성장했다”며, 특별히 고 황유미씨 사건을 언급했다. 황유미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같은해 11월20일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2008년 2월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이 발족됐다. 지난 8월 대법원은 처음으로 삼성전자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과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했다.

“그 어떤 취재 노하우도 통하지 않았다”

―삼성을 취재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솔직히 말할까? 차라리 북한을 취재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여러 차례 들었다. 삼성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엔엔>(CNN), <비비시>(BBC), <블룸버그> 등 외신에 삼성과 관련한 논평이라도 밝힐라치면, 삼성은 즉각 ‘신뢰성이 없다’며 반박부터 했다. 나의 기자 평판을 무너뜨리려는 작업도 있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삼성) 직원들은 익명 보장을 거듭 약속해도 ‘삼성이 두렵다’며 전화조차 피하더라.”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삼성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가장 필요했다. 그 어떤 취재 노하우도 통하지 않았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국에는 삼성에 대해 쓴 책들이 꽤 있다. 읽어본 적 있나?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자서전부터 영문 서적까지 관련 서적 대부분을 읽어봤다. 그중에서도 한때 삼성의 내부자였다가 퇴사 뒤 사내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막상 취재해보니 김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던가?

“상당 부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동안 삼성이 증거인멸 등의 불법행위를 해왔다는 법적 자료가 존재한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압수수색당할 때를 대비해 증거인멸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든 기구도 삼성 내에 존재했었다.”

케인은 “삼성의 성공 케이스를 한국 경제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보는가”라는 질문에 “한 개인의 리더십에서 탄생했다기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서 나온 성과로 보는 게 맞다”고 답했다.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국민의식, 적어도 북한보다는 성장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이뤄진 시대적 본능이 현재의 ‘삼성 신화’와 재벌 문화를 만들었다.” 그는 “삼성이 자신들의 성공을 ‘가문의 영광’으로 자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이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식 재벌 체제가 갖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이 회장은 그동안 ‘잡음’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삼성의 성공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현재 삼성은 일본 기업 소니를 뛰어넘었고 미국 기업 애플을 바짝 뒤쫓고 있다. 군대식 접근법을 통해 이루어낸 성장은 일부나마 분명 성공적이었다. 재차 말하지만 삼성이 그를 리더가 아닌 ‘신화적’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게 문제다.”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가?

“한국에 출간된 기존의 삼성 관련 책들은 삼성의 성장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게 대부분이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 삼성의 숨겨진 일화를 밝히면서도 (삼성이) 그동안 해외에서 어떻게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살아있는 정보를 전하고 싶었다. 해외 독자를 위해서는 삼성가의 세습 경쟁 등 이미 한국인은 잘 알고 있는 재벌 문화 전반을 담았다. 전체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현재 법적인 검토를 받는 중이라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 부회장의 숨겨진 일화도 다수 담을 예정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만 출간될 예정이라던데.

“한국 출판사 14곳에 문의를 해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단 한 군데만 출판 의사를 밝혀 왔는데, 이마저도 이 부회장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자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의 재벌정책, 삼성에 ‘변수’ 될 것”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지 올해 20년째다. 경제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져온 기자 입장에서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한국 경제를 비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이전에는 제조업에 집중한 반면, 외환위기 이후에는 소프트웨어, 온라인 서비스, 휴대전화 등 창조적인 산업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상당수 기업들은 기존 제조업에 적용됐던 군대식 기업 문화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삼성의 경우에도 ‘삼성 스타트업’이라는 사내 정책을 통해 기업 문화를 조금이라도 독립적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구식 문화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당분간 큰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가 그나마 ‘변수’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바라보는가?

“재벌개혁 관련 내용은 사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도 있었던 거다. 당시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던 걸 봤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 대통령이 ‘재벌 저격수’라고 불리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임명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이전 정부와는 다른 움직임이다. 그래서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다.”

―삼성에 하고 싶은 조언이 있는가?

“‘가족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립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당시 정경유착 등의 시대상을 비춰봤을 때 일부 허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영권이 세습되고 회장을 신격화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는 건 문제다. 이 부회장의 경우 똑똑하고 인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실적으로 삼성에서 그가 이뤄낸 성공 사례가 없지 않은가. 외부 전문가가 경영을 맡는 게 필요하다. 아마도 문 대통령의 재벌개혁이 성공한다면 (삼성에도)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케인은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은 촛불혁명을 이뤄낸 나라”라며 “시간이 문제일 뿐 고 황유미씨의 사례처럼 삼성의 노동자들은 종국에는 자신들의 민주적 권리를 찾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민의 심판을 받기 전에 삼성이 먼저 자체적으로 변화해 진정한 ‘신화’를 이뤄냈으면 한다.” 그의 마지막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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