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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사도세자 묘지문에서 직접 밝힌 죽음의 이유

  • 김원철
  • 입력 2017.12.01 10:57
  • 수정 2017.12.01 10:58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

-사도세자의 묘지문 중

정확히 18년 전인 1999년 12월 1일,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지 237년 만에 그의 묘지문이 세상에 공개됐다. 묘지문이란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된다.

사도세자 묘지문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령해 끝내 파국으로 몰아간 아버지 영조가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며칠 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달 뒤 ‘직접’ 썼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묘지문의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한중록' 등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심정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 묘지문.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누리집

공개되기까지

사도세자 묘지는 19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배봉산에서 출토된 문화재다. 사도세자의 능은 그의 아들인 정조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1796년 원래의 배봉산에서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의 현릉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묘지석은 그 당시 수습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이후에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봉산은 사도세자를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서쪽 벌판에서 매장하노라”라고 적은 묘지문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장소다. 묘지석의 외형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의 청화백자로 만든 사각형 판석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5장씩 2벌 모두 17장이 출토됐다. 2벌은 묘지석 크기와 묘지문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

묘지석은 오른쪽에는 ‘사도세자 묘지’라고 쓰여있고, 왼쪽에는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등으로 순서가 매겨져 있다. 지문은 장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8행 15자를 기본으로 한다.

묘지석은 1979년 국고에 수입된 뒤, 198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책자인 <중요발매장문화재도록>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채 발굴된 모습 그대로 수장고에 보관돼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사료적 가치에 주목해 깨진 지석들을 접합하고 보존 처리한 뒤 1999년 12월 1일부터 한 달간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세간의 큰 반향이 일어났다.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제1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어제지문 유명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가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 (1735) 1월 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 오호라 ,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 오호라 ,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

‘어제지문’으로 시작하는 묘지는 내용상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어제’는 임금, 즉 영조가 직접 썼다는 뜻이다. 먼저 제1장의 6행까지의 첫 번째 부분은 세자의 탄생과 유년기의 총명함을 기리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 영특했고 장성해서는 문리가 통달하여 성군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일삼아 계도하려고 했으나 제멋대로 소인들과 어울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여기서 언급된 ‘태갑’이라는 인물은 고대 중국 은나라 성탕왕의 손자다. ‘태갑’은 무도(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됨)하여 신하에게 멀리 추방당했다가 허물을 고친 뒤 다시 복위되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제2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아 !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오호라,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오호라 ,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제2장 3행까지로 이뤄진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인의 덕과 위업을 기리는 내용 대신 세자의 비행과 방탕함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조는 예부터 무도한 인군은 많았지만, 세자 때에 이와 같이 무도한 경우는 듣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를 두고 아들을 뒤주 속에서 죽게 해 세상에 없던 일을 아비에게 행하게 했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 잘못은 제대로 가르쳐서 이끌지 못한 아버지인 자신에게 돌렸다.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제3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 백성을 속이는 것일지니라.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 5월하고도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오호라,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오호라,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 데 대한 교시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

제3장 5행까지로 이뤄진 세 번째 내용은 이 묘지문의 절정이다. 사도세자가 숨진 임오화변의 간략한 전말과 아버지인 자신의 비통함을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강서원(왕세손의 교육을 맡았던 관청으로 뒤주를 놓아뒀던 곳)에서 여러 날 지키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종묘사직을 위함이고 백성을 위함이었다”라고 언급해 자신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순의 아비에게 이런 지경을 만나게 한단 말인가”라고 적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깊은 탄식과 회한의 심정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제4장·제5장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 ‘융릉’. <한겨레>자료 사진. 강판권 교수 제공

7월 23일 양중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 오호라,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세자는 임술년 (1742)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 (1743)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 (1744)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 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 홍씨를 맞아들였다. 빈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외소세손이며 둘째도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목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 청풍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장녀 청연군주 , 차녀 청선군주가 있으며 측실로 또한 3남 1녀의 자제를 두었다.

승정 기원후 135년 임오 (1762,영조 38년 ) 7월 일.

제4장 5행까지는 약간 차분해진 문체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로서 자식인 세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을 담았다.

영조는 이 장에서 국가와 왕실의 문장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묘지문을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입으로 불러 받아 적게 했다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어제(직접 쓴)지문’이라 할지라도 신하가 대신 쓰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세자 묘지문’의 경우 영조가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며 직접 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영조는 이는 30년 가까운 부자지간의 은의를 밝힌 것이라고 적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이 지문으로 부왕인 자신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기를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아울러 영조는 세자의 죽음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으로 같은 해 7월 세자에게 ‘사도’의 시호를 내려, 이후 ‘사도세자’라 불리게 했다.

참고문헌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조선시대 법령자료 <대전통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연구휘보 제 115호

<휘경동출토 백자청화어제사도세자묘지명 >-김울림

<조선시대 묘지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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