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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보고서를 만들자!

여성 전임교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성비를 억지로 맞추자는 게 아닙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숫자를 자연스럽게 되돌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운동장 바로 세우는 일을 더불어 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운동장 안에 가만히 있으면 그게 기울어져 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여성이나 타교 출신 교수 비율 등을 의식적으로 살필 필요가 그래서 있습니다.

올해 9월에 발표된 '서울대 다양성 보고서 2016'을 살펴봤습니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여성 비율이 각각 40.5%와 43.2%로 나와 있더군요. 여성 전임교원 비율은 15.0%입니다. 그런데 비전임 전업 교원/연구원 중엔 57.6%가 여성이었습니다. 요컨대 여성 전임교원은 매우 부족하고, 여성 비전임 교원/연구원은 외려 남성보다 많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공과대학은 여성 학부생과 대학원생 비율이 15.5%와 16.5%, 여성 교원 비율이 3.2%에 불과하다 합니다.

서울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서울대 교수는 전체 한국인 전임교원의 84.8%에 해당합니다. 이른바 타교 학부 출신 교수가 15.2%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15.2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여성 전임교원 비율인 15.0과 아주 가까운 숫자입니다. 여성 교수와 타교 학부 출신 교수는 그렇게 교수사회의 소수자로 남아 있습니다. 15.0%는 문제지만 15.2%는 어쩔 수 없다 여기는 서울대 사람들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겐 고등학교 성적과 표준적 입시 결과 하나로 어떻게 개인의 잠재력을 한 번에 평가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상황은 다른 대학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육부가 2014년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연세대와 고려대의 모교 출신 교수 비율은 2013년 4월1일을 기준으로 각각 73.9%와 58.6%에 이른다고 합니다.

박은정 교수가 화제입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옛 톰슨 로이터)가 선정한 세계 상위 1% 연구자(HCR)에 2년 연속 이름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는 경력 단절 주부로서 마흔을 넘겨 박사학위를 받은 계약직 연구 교수였습니다. 박 교수 사연을 소개한 기사의 제목엔 박은정이란 이름 대신 '경단녀 박사'란 표현이 등장하고, 기사는 '흙수저 출신...'이란 말로 시작됩니다. 온갖 좋은 조건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연구중심대학 교수도 하기 어려운 일을 그런 이력의 소유자가 성취해냈다는 건 감동적인 소식이었지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카이스트와 경희대가 박은정 교수에게 정규직 교수 자리를 제안했고, 박 교수는 경희대를 선택했다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역경을 극복한 개인의 아름다운 성공담에 머물지 않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 안에 여성 연구자,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오지 못한 연구자,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문제가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HCR에 두번이나 선정될 정도면 상위 1%가 아니라 0.01~0.1%는 될 거란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 학자에게 안정적으로 연구할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특별히 뛰어난 연구자라야 출산과 육아 등의 부담이나 사회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긴 매한가지라 여깁니다.

여성 전임교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성비를 억지로 맞추자는 게 아닙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숫자를 자연스럽게 되돌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운동장 바로 세우는 일을 더불어 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운동장 안에 가만히 있으면 그게 기울어져 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여성이나 타교 출신 교수 비율 등을 의식적으로 살필 필요가 그래서 있습니다. 국내 대학으론 처음 발표된 서울대 다양성 보고서가 반가운 까닭입니다. 보고서에 나온 숫자들은 좀 걱정스러워도 말입니다. 다른 대학들도 다양성 보고서를 만들기로 하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게 먼저니까요.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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