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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거절을 거절하고 싶다

이문체육문화센터 헬스장에서 '정중히 쫓겨난' 임현수씨 사건. 장애인 차별은 발생했지만, 그 누구도 차별을 의도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상황을 낮추면서까지 교양있게 장애인을 대하고 염려한 죄밖에 없다는 무고한 이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 변재원
  • 입력 2017.11.22 10:03
  • 수정 2017.11.22 10:08

"그러다 다치시면 어떡하려구요."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의도치 않게 매일 듣게 되는 걱정이다. 이 발화 속에는 지인의 선의가 깃들어져 있기도 하고, 담당자의 권태로움이 담겨있기도 하고, 주변인의 혐오가 담겨있기도 하다. 그들은 '다치시면'이라는 높임말의 가정을 통해 나의 인격을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본래 이 질문의 의도는 그렇게까지 상냥한 편이 아니다. 장애인인 '당신이' 다치시게 되면을 가정하는 염려의 말보다, 그러다 '내가' 다치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크게 담겨져 있다. 그러니까 각박한 한국 사회의 너그러운 교양인으로 비추어지기 위한 호혜로서 장애인에 대한 존중을 힘껏 표현함으로써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네가) 그러다 (내가) 다치면 어떡하라구요."가 적당히 어울릴 것이다. 장애인은 평온한 일상의 리듬을 깨뜨리고 잠재적인 위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고유발자로 취급된다.

얼마 전 근육운동을 하기 위해 이문체육문화센터의 헬스장에 방문한 임현수씨는 현장의 트레이너 선생님과 공무원으로부터 "그러다가 다치시면 어떡하려구요"라는 말을 듣고 정중히 쫓겨난 적 있다.(▷관련기사 : "운동 장비 없다"..장애인 내친 구청 헬스클럽) 문전박대를 당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활동보조인과 함께 방문했음에도, 본인이 하고자 하는 운동이 위험의 부담이 없는 제한적인 근력 운동이라고 설명함에도, 담당 직원들로부터 헬스장이 2층에 위치해있다거나, 장애인분들이 샤워하기에 위험한 노후된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거나, 장애인을 도와줄 전문 자격인이 없다는 이유의 양해를 들으며 쫓겨났다.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고, 민원 제기가 본격화되자 임현수씨의 헬스클럽 가입을 거절했던 트레이너와 공무원은 줄곧 민원인 중심의 입장을 갖고 우려를 표명했다. 임현수씨와 같은 장애인 손님을 모시기에는 우리 시설이 좋지 않다고 하거나, 민원인께서 장애인 복지관에서 전문 장애 재활 트레이너로부터 교육을 받으면 더 안전하게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식의 답변들이었다. 결국 장애인 차별은 발생했지만, 그 누구도 차별을 의도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상황을 낮추면서까지 교양있게 장애인을 대하고 염려한 죄밖에 없다는 무고한 이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번 민원이 공론화되면서 장애인이 장애인복지관에 가지 않고, 동네 헬스클럽에 가는 것은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결정이라는 비난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대답을 한 공무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후화된 시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여기서 운동하겠다는 장애인 민원인이 이기적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장애인은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 혹은 교양 없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나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맞벌이 부모님 밑에 자라며 두 살 위의 형이 나를 키우다시피 했다. 열 살의 형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동네 태권도장에 가서 태권도를 하다 왔는데, 부모님께서는 그 시간동안 나 홀로 남겨지는 것이 불안하셨는지 형과 함께 다니라며 태권도장에 등록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단 하루밖에 다니지 못했다. 형은 두 손 꼭 붙잡고 나와 함께 태권도장에 가서 태권도 사범님들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형의 씩씩한 소개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사범님들은 나를 보며 난색을 표하셨다. 장애인 견습생은 처음 받아보는데, 태권도 수련을 받다가 다치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결국 그 날, 허공을 향해 주먹 찌르기 연습만을 몇 번하다가 태권도장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부모님께서는 나보고 태권도학원에 가지 말고 집에 와서 형 올 때까지 누워 있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형에게 듣자하니, 태권도 사범님께서 직접 부모님에게 전화하여 환불해 줄테니 동생은 태권도장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혹여나 다칠까 싶은 것이 주된 이유였다.

나는 8살 때 정중히 거절당한 기억을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여전히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 병원에 가도 대학병원이 아닌 이상 의사들이 나를 진료하는 것을 거절하고, 재활을 위해 스포츠 시설을 방문해도 나의 등록을 거절한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능력과 일터를 깎아내리면서까지 정중히 나를 거절했다. "그러다 다치시면 어떡하려구요."라는 말을 듣고 사는 것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고, 나는 그 이타적인 염려와 함께 사회로부터 번번히 분리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행정학과의 교수님 논문 중에 '약자의 설득전략'이라는 제목을 가진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의 제목과 같이 강자가 약자를 설득하는 방식과 약자가 강자를 도리어 설득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설득하는 방식은 어렵지 않다. 그 어떤 강압적인 태도도 필요하지 않고, 언성을 높이거나 부딪힘을 유발하지 않아도 된다. 강자들은 그저 그들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교양만을 보이면 된다. '이러이러하여 실행하기가 힘들것 같다'거나 '이러이러한 상황인데도 실행하지 않을텐가'식의 물음 정도만 던지면 대부분의 약자들은 순응할 수밖에 없다. 철저히 강자 중심으로 이룩된 사회의 언어를 교양 있고 합리적인 의사표현을 거쳐 발화하는 순간, 강자는 더욱 품격 있는 강자가 된다.

그러나 강자의 언어에 반론을 제기하는 약자들은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다. 그러한 반론의 대부분 근거는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정되지 않는 말들로 취급된다. 약자의 언어를 껴안으며 발전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약자들은 다른 전략을 취한다. 더이상 강자에게 반박하기보다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다 다치시면 어떡하려구요."라는 강자의 언어를 뛰어넘기 위해 장애인 본인은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해야 한다. 맹세로도 부족하면, 자신의 신체와 인격을 증명해낼 것들이 필요하다. 의사의 소견서부터 시작하여, 이 동네에 몇 년간 살면서 이웃과 불화가 없었는지, 대외 활동 표창장 등을 한껏 보여주면서 비장애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 모든 적극적인 노력은 청담 어딘가에 위치해있는 재계 소셜 클럽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체육시설에 등록하기 위한 인정받는 절차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 합리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설득전략은 강자의 환경과 동화되는 것 정도이다. 자신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만큼' 위험하지 않고, 건강하며, 쾌활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약자의 설득전략으로 취급되는 사회이다.

강자의 언어는 품격 있고, 약자의 언어는 거칠다. 강자의 언어는 느긋하며 호흡이 길고, 약자의 언어는 급박하고 호흡이 짧다. 강자에게 인정받아야만 개별적으로 살아남을 자격을 부여받는 약자의 설득전략. 약자는 언제쯤 약자만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현실에 비추어 다시 표현하자면, 장애인은 언제쯤 상냥한 강자의 호혜에 대들 수 있을까. 장애인은 언제쯤 자신이 위험하지 않음에 대해 증명하는 것을 멈추고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친절한 거절의 언어 속에서 장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은 아직까지 지루하고 불쾌하다.

* 이 글은 비마이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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