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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IMF사태를 겪었던 한국의 놀라운 풍경 7가지

  • 백승호
  • 입력 2017.11.21 14:06
  • 수정 2017.11.22 04:18

정확히 20년 전, 대한민국 경제가 붕괴 직전까지 갔다. 우리에겐 경제위기의 대명사로 알려진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 당시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 나라에 고금리정책, 강도높은 구조조정, 공공부문에 대한 영리화 등을 포함한 각종 요구를 해왔다. 한국의 경제는 망가졌으며 실업자가 속출했고 각종 경제지표는 믿지 못할 정도로 급변했다. 매일 믿기 힘든 뉴스들이 엄청나게 터졌던 시절이었다.

20년 전, IMF구제금융을 받기로 결정한 뒤의 대한민국의 풍경이 어땠는지 인상적인 것들을 나열해 본다.

1.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냈다.

지금은 아련하지만 그때는 잘나갔던 기업 대우(아이폰 수리 대행해주는 회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IMF 이전까지만 해도 재계 서열 4위의 엄청난 대기업이었다.)를 포함해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한보사태의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진로그룹, 기아그룹, 해태그룹, 쌍용그룹 등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이때 망했다. 대기업이 이정도였으니 중소기업은 말도 못했다.

2. 실업자가 속출했다.

기업들이 계속 도산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듬해인 98년, 127만명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실업자 수는 57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세배 가까이 뛰었다. 박근혜 정권 임기 말 실업자가 135만 명에 육박하며 IMF때와 맞먹는 수치를 기록했지만 한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IMF 당시에 높아진 실업률은 취업을 못해서가 아니라 한꺼번에 이뤄진 해고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엔 취업도 힘들었다.

3. 주식시장이 반의 반토막이 났다.

IMF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상황은 순항중이었다. 적어도 주식시장은 그랬다. 95년 WTO가 공식 출범될 당시에 1200선 가까이 갔었던 코스피 지수는 IMF와 구제금융을 합의했던 97년 12월에는 400선을 밑돌았고 이듬해 6월에는 280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 수치는 오래지 않아 회복되었다. 2000년 중반 불어닥친 닷컴 열풍으로 코스피는 IMF 이전 수준을 금세 회복했다.

4. 원-달러 환율이 2000원에 육박했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800원 초중반대였다. 당시의 한국 경제규모에 비해선 고평가되었던 원-달러 환율은 IMF 사태 이후로 걷잡을수 없이 상승하게 된다. 1997년 12월 23일에는 1,962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당시 급격하게 상승한 환율 때문에 유학생들은 한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한국에 있던 대학생들도 휴학을 하거나 군입대를 자원해, 당시 입대를 하려면 몇달씩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5. 집값이 폭락했다. 이렇게 떨어졌던 적이 없었다.

조선비즈가 보도한 국민은행 자료에 따르면 1998년 한 해 동안 집값은 평균 12.4%, 전세금은 18% 넘게 떨어졌다. 당시 보도를 보면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져 은행이 추가 담보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서울 반포동 미도아파트(34평)가 1억 6천만 원에 팔렸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이때 폭락한 부동산 급매물을 재빠르게 매수해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6. 금리가 미친듯이 올랐다.

IMF금융위기 당시 사람들은 불안해서 현금을 쥐고 있었고 돈이 시중에 잘 돌지 않았다. 당시 은행은 1년 확정금리 20%, 3년 65%를 내걸기도 했다. 지금 시중 은행 금리가 1~2%로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금리 인상은 IMF의 요구이기도 했다. 자본유출을 막아야한다는 명목하에 강행된 고금리 정책은 국내 기업과 가계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고 당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 등 주요 경제 석학들은 긴축을 요구하는 IMF의 요구가 잘못되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7. 외국에서도 믿지 못했던 그 사건,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외환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나라 전체를 엄습했다. 국민들 사이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자기 집에 있는 금붙이를 나라 살림에 보태 쓰라고 기증하기 시작했고 3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금모으기 운동엔 금 200톤 이상이 모였다. 당시 금모으기 운동의 여파가 어느정도였냐면, 98년 초 국제 금값은 18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외환위기 발생 20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IMF 외환위기의 극복 원동력으로 54.4%가 금모으기 운동을 꼽았을 정도로 당시엔 인상적인 움직임이었다.

금모으기 운동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겨레21에 따르면 당시 금모이기 운동으로 모인 금의 순도는 실제보다 2~3%정도 낮게 책정되었고 이를 금액으로 따지면 5~600억 가량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업무를 담당한 종합상사들은 '금을 모으고 수출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한겨레 21은 '220t을 모으고 수출하는 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되고, 자살자가 속출했으며 한순간에 전재산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혹자는 '단군 이래 최대 환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IMF 20년을 맞아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분석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다시금 그런 악몽을 맞이하지 말자는 다짐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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